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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장 폴 사르트르

by librovely 2014. 11. 2.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문예출판사

 

도서관에 갔다가 문예 출판사의 책도 있길래 빌려왔었다

이 책과 지난 번에 읽은 책을 동시에 빌려다 놓고 둘 다 읽고 여기에 발췌는 안하고 미루고 있었다

그냥 뭔가 제대로 못 읽은 거 같아서...그래서 외출할 때 가방에 넣어 갔다가 이 책은 카페에서 다 읽었다

다 읽은 건 아닌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부분만 그러니까 57쪽까지만 읽었으니까...

그 뒤도 읽어볼까 시도했는데 몇 장 읽고는 아직은 무리...라는 결론이...좀 더 공부해보고 나중에 읽자

 

문예 출판사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어서 머리에 들어와있던 출판사

나랑 뭔가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읽으면서 좋았던 책

에리히 프롬은 그렇게 사랑의 기술을 알고 있었기에 여러 번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셨던데

사랑도 기술이 필요하다...연애중인 남녀가 있다면 둘이서 커플링이나 촌스럽게 커플티 따위 사지 말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사서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눈다면 되게 멋질 거 같다...커플북! 허세 작렬인가? ㅎ

다른 방향으로는 몰라도 지적인 방향으로는 허세 좀 떨어도 나쁠 건 없는 거 같다...그나마 남는 게 있지 않나

 

두 권의 책을 읽어서 그런지 아님 4번이나 비슷한 내용을 읽어서 그런지 이젠 발췌할 부분이 좀 줄어든...

내용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룰이 있는 게 아니다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하고 그렇게 살면서 창조하는 것이다 도덕이란 것도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내 행동으로

그렇게 내가 인간이라는 류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고 설령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일단 무신론자에게 어찌보면 더 적합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우리는 태어나면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지...내가 만약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그래서

신의 존재를 믿고 의지한다고 해도 그 종교를 일단 믿기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교를

믿더라도 그 믿는 모습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게다가 세계를 장악한 내가 믿는 종교만 봐도 시대에 따라서

구체적인 모습은 많이도 바뀌어 온거고... 그러니까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도 실존주의는 불경한 건 아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실존주의를 이상하게 보려고 하는 이유가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선택의 공포 때문일지도

모른다...자유가 주는 공포...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일

다 정해져 있는 게 더 맘 편하게 살다 죽을 수 있는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다 정해져 있다는 삶의 태도가

많이 많이 퍼져있다 나이마다 세세하게 해결해야 할 발달과업이 다 정해져 있고 또 행복하게 살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다 정해져 있으며 그 안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너도나도 오지랖퍼 돌변하여 그렇게도

충고를 해댄다...그런데 어쩌면 그러는 게 다 불안해서 그러는 걸지도 몰라...불행해서 그러는 걸지도 몰라...

나는 그냥 세상에 만연한 룰대로 살아왔는데 이게 맞는지 어쩐지 생각조차 의심조차 안하고 그냥 그대로

달려왔는데 생각해보니 이게 맞나? 내가 과연 그래서 행복한가? 이게 내가 원한건가? 그게 확신이 서지 않네..

근데 그 룰대로 자의건 타의건 살지 못하는 인간이 있을 경우...그를 내가 쪼아대야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내 삶이 옳다는 말이 되는거니까...그리고 그들을 욕하는 것 손가락질 하는 것은 결국 나 이대로

살아도 괜찮아 나 잘 살아온거야...라는 다독임이 되는 거니까...하여튼 저런 면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정말 세상의 룰대로 살았더니 되게 행복했을 수도 있다...그게 그런거라면 그는 뭐 그 룰을 선택한 것도

스스로 한거니까 그 또한 실존주의에 맞게 살아온거고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산 셈이 되는거지~ 분명 그런

경우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저렇게 주어진 룰대로 잘 밟아왔는데 정말 행복하네~ 그럴 수도 있지

 

자유롭게 산다는 것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주말의 나를 돌아볼 때 느낄 수 있다

평일에는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저녁먹고 운동하고 남는 시간에 TV보고 책 읽기에도 바쁘다

하지만 텅~빈 주말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없으니 시간을 이리 저리 분배해서 써야 하는데 할 일이 없는 경우

허무의 구렁텅이가 입을 쩌억 벌리고 나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일주일 중 그 짧은(?) 나에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그게 날 힘들게 만드네...가끔은 생각한다 학생 때가 좋을 때야...라고 하는 이유가 그런 뉘앙스로

읽힐 수도 있다는...그때는 그냥 공부만 하면 되는거잖아(근데 넌 왜 그것도 안했니 못했니...그러게....)

그런데 학생 기간이 지나면 갑자기 목표 상실...내가 막 정해야 하고...얼마 전에는 동료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 허무함의 뉘앙스를 누군가가 풍기길래 나야 뭐 결혼도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으니 내가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건가요 하니까...자기도 안다고 자신이 직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이도 둘이나 잘 키우고 있고 서울의 괜찮은 동네에 아파트도 있고 차도 있고 남편도 여전히 잘해주고

좋아하는 해외 여행도 열심히 다니고 있고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할거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허무함이 든다고...그러니까 뭔가 눈 앞의 해결할 일이 없어서 그런거 같다고...

당장의 문제들을 해결해가며 사는 게 어쩌면 자유가 없고 그냥 살아있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듣고는 아마 목표의식이 없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하자 자신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왜 사는가...가 정립이 안되면 자꾸 허무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일게다...눈 앞의 자잘한 것들이

해결되는 그 순간의 허무함은 삶에 의미에 대해 스스로 찾아내야만 해결이 되는 게 아닐지...

난 뭐 눈 앞의 문제 투성이니까 나중에 천천히 찾아도 되겠구나...ㅡㅡ;

 

하여튼 저런 이야기는 처음 했는데 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았다 뭔가 속 깊은 이야기를 한 거 같아서

껍데기 이야기 자기에 대한 나쁘지 않은 이야기만 들려주는 사이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지...

나 같은 경우 들려줄 너절한 이야기가 많으니 사람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며 깊이 친해지기 용이하겠는걸

이게 내 존재의 이유일까나...니 구질구질한 인생이 타인의 인생이 좀 나아 보이게 만들어 준다? ㅎㅎ

 

진중권이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저마다의 삶이 예술이 되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이야기였던 거 같다

실존주의 철학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

 

 

 좋은 책이다

다시 봐도 좋은 책

 

 

 

 

 

 

 

 

 

 

실존주의는 너무나 침울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

요컨대 내가 독자들에게 서술하려고 하는 이론에서 공포를 주는 점은 그 이론이 인간에게 선택 가능성을

남겨둔다는 사실 아닐까?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주체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더 일관성이 있다

신이 없다면 적어도 본질보다도 앞선 하나의 존재

어떠한 개념으로 정의되기 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게 된다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의 실체

실존주의자가 상상하는 사람이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되어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성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상상할 신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면 사람은 자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이 없다면 무엇이고 허용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출발이다

사람은 자유로우며 사람은 자유 그것이다

 

사람이란 아무런 의지도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창조하도록 선고받고 있는 것이다

퐁주는 자신의 글에서 사람은 사람의 미래다라고 말했다

 

정적주의 그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으리라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내가 소개하는 이론은 정적주의와 정반대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현실은 행동 속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한 걸음 나아가 덧붙여 말하기를

사람은 자신의 창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을 실현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은 그의 행위 전체와 그의 삶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비겁한 인간 혹은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가 말하는 것은 비겁한 인간은 스스로 비겁하게 되는 것이고 영웅은 스스로 영웅이

된다는 것이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선험적으로 설정된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고 비난한 적이 있는가

그가 그려야 할 그림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는가

꼭 그렇게 그려야 하도록 정의된 그림은 있을 수 없으며 예술가는 자신의 그림에 투신하는 것

그가 그려야 할 그림이란 그가 그리게 될 그림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선험적 미학적 가치라는 것은 없지만 그림의 일관성 속에 또 창조의 의미와 그 결과와 관계 속에

사후에 볼 수 있는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도 내일의 그림이 어떤 것이 될 지 말할 수

없다 그림은 그려진 다음에야 비로소 평가될 수 있다 그것이 모럴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창조적 시튜아시옹 속에 있다 우리는 결코 예술 작품의 무상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피카소의 그림 한 폭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가 그리는 동시에 자신을 형성했고 그의 작품 전체가 그의 생활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의 모럴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이며 환경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모럴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경우 자신의 자유밖에는 원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나는 타인의

자유 말고 다른 것을 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경건한 심정 혹은 결정론적 구실로 그들의 완전한 자유를 스스로 은폐하려는 사람들은 나는 비겁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살기 전까지는 인생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들이 할 일이고 가치란 우리들이 선택하는 그 뜻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처럼 무신론적 태도를 모두 절망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주장은 본원적인 절망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차라리 신이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견해다

신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신의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을 재발견해야 하며 비록 신의 존재에 대한 유력한 증명자일지라도 사람 자신 말고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하나의 낙관론이고

행동의 이론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절망을 우리의 절망과 혼동하여 우리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의 그릇된 고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