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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사랑의 사막 - 프랑수아 모리아크

by librovely 2015. 9. 30.

 

 

사랑의 사막                                                                      프랑수아 모리아크             펭귄클래식코리아

 

<테레즈 데케루>를 읽었고 너무 좋았기에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지 마음 먹었었다

얇은 두께 그리고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뭔지 모르지만 대상 수상 작품이라기에

그리고 뒷 페이지에 빨간 글씨로 쓰여 있는

우리는 모두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진다 그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이다

라는 글 때문에 그리고 그 글 아래를 슬쩍 보니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글 때문에 빌려왔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설정은 뭔가 좋지는 않았다 얼핏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도

떠오르게 했다 그 소설에서 아마 소년이 사랑한 여자가 알고보니 자기 아버지와 그런 사이였던...

그런데 읽어보니 뭐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설정이긴 하지만 여자는 아들만 사랑했던 거고 뭔가 예상했던

거북스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따로따로 느껴질 뿐이었다 마리아를 향한 아버지의 짝사랑

그리고 마리아와 레몽의 어설프게 어긋나버린 사랑 그렇게 서로 다른 종류의 모습을 보여줬기에 그리고

어쩌면 두 경우 모두 마음만 오고 간 그런 상황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제목이 사랑의 사막...내용 중간에도 사막이라는 단어가 언급되기도 하는데...사막...은 무슨 의미일까?

건조한 뭔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그런 의미일까?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도 그 사이에 사막이 있었고

아버지의 지나온 사랑들과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향한 사랑도 일방적이었기에 사막 한가운데 있었을 뿐이었고

마리아와 레몽의 관계는 나이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서투름과 오해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 뭐 이런 걸로 인해

사막이 놓여졌던 거겠지...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랑은 모두 이뤄지기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긴 하다

일단 레몽의 아버지는 불륜을 시도했던 거고 레몽과 마리아는 유부녀와 소년이라는 것 그리고 나이 차이...

그렇지만 이뤄지지 않은 사랑의 본질은 이런 요소들 때문에 더 강하게 드러나긴 했으나 일반적인 것들이겠지

 

얼핏 보면 별 거 아닌 스토리 같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가지를 보게 된다 이런 저런 경험이 많은 사람이

읽을 경우 다양한 생각들이 중간 중간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뭐 온전히 소설 속 인물들

안에서만 생각하고 경험할 수밖에 없었지만...

 

레몽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서로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

대개의 레몽과 같이 어린 남자들은 나이가 많은 여자라면 일단 정신이고 뭐고 상당히 육체적인 방향으로만

골똘할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고 또 마리아 처럼 결혼이나 출산 경험이 있는 나이가 꽤 있는 여자의 경우 어린

남자를 만나면 저 남자가 나를 쉽게 보면 어쩌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것 같고 (아니 이 소설 속에서 마리아는 아예

어린 레몽을 두고 그런 식의 관계를 꿈꾼 게 아니었다 그냥 그 아이가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녀는

돈 많은 남자와 재혼한 그렇고 그런 여자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많으며 성적인 것에는

별 관심도 없는 남들 눈에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여자라는 식으로 그려진다)그러니 이 간극은 실제보다 훨씬

커질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마리아가 레몽에게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레몽은 마리아를 전혀 그런

식으로 오해하지 않았었는데...그리고 어쩌면 레몽을 위해서 한 마리아의 행동이 레몽에게는 이상하게 심한 상처

로 남은거고 그게 그 뒤의 레몽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거고 레몽은 마리아에 대한 분노만 남아 있었는데 뒤늦게

그게 사실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거고 마리아 또한 레몽과 그렇게 관계를 망쳐

버린 후 자살시도를 할만큼 그를 좋아했지만 현실적인 방향으로 살 길을 찾은거고 뒤늦게 나타난 레몽에게

그 폭풍같던 시기의 자신의 마음을 끝내 꺼내놓지 못하고 그런 일이 이젠 기억조차 가물거리고 아무 의미도 

없는 바보짓에 불과하다고 말해버린다... 하긴 재혼까지 해버린 시점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이 와중에 오랜만에

마리아와 재회를 하게 된 레몽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에게 접근을 시도한다...애처로울만큼...그런 모습을 레몽도

지켜보는데 그 모습에서 그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 한걸까? 이 사막은 아직도

진행형이고 죽기 전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레몽에게 아버지는 한 가지 살 길에 대한 힌트를 들려주는데

그건 결혼을 하라는 것 결혼을 해서 갖가지 근심거리를 짊어지게 되면 정말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다는 뉘앙스를...음...이건 여러가지 생각을 만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비단 사랑 뭐 그런 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어쩔 도리 없이 머리속에 맴돌고 마음을 어지럽게 할 그런 질문들은 사실 바쁘면 저 멀리

처박히곤 하니까...바빠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사이코

스러운 소리 잠시 해본다...

 

이런 책을 읽고 여러가지 생각들을 펼칠 수 있는 바탕이란게 없기에 사실 쓸 말도 많지 않다...

2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짧지만 강렬한 빽빽한 그런 소설이다 속죄는 길지만 어찌보면 알맹이는 간단?

물론 그 긴 부분들이 분명 의미가 있었긴 했지만...이 소설은 짧지만 알맹이는 속죄보다 더 많고 복잡한 느낌이..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긴 소설의 압축본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페이지마다 골똘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았다

능력이 안되어서 세밀하게 끄집어 내지는 못하였지만 부분부분 던지는 메시지가 많았던 것 같다

 

뒷 페이지에도 나온 그 글도 골똘해지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진다는 말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겠지

근데 그 만남이 사랑이라는 광기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면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거겠지...짧건 길건 얼마나 깊은 관계였건 어찌되었든 내 삶에 잠시 들어왔다 나간 남자들로 인해

그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부분은 분명 있었던 것 같고 특히 다음 남자를 만나게 된 경우 그 이전의 경험들이

내 반응을 다르게 만든 면이 있는거지...이 소설에 나온 설정을 빌려오자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주저하고

방어적으로 대하다가 망쳐버린 경험이 있었다면 그 다음 또 비슷한 상항에 놓일 경우 그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

할 테니까 레몽도 다음에 또 마리아와 같은 여자를 만났다면 그때처럼 밑도 끝도 없이 나아가지는 않았겠지

이건 너무 긍정적인 소리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레몽처럼 마리아에게 거부당했다고 오해한 마음 때문에 그

이후의 연애가 진지해지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거나 상대 여자에게 치욕스러운 마음을 주는

방향으로 뒤틀릴 수도 있는거겠지...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는 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럼 나는 안 빚어진거네...나는 계속 안 빚어진 상태로 살아야 하나요 신이시여...ㅜㅜㅜㅜ

 

이런 소설을 읽고 진지하고 깊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간접체험만 해도 상당히 익사이팅한거다

어쩌면 실제보다 이게 더 사실적인 걸지도 모른다 진짜는 없다 영화 속 드라마 속 소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어지는 밤이다...

 

좋은 소설이다

무조건 읽어봐도 좋을 책

 

 

 

 

 

 

 

 

 

 

 

 

나중에 레몽 쿠레주는 이 운명적인 밤의 사건을 찬찬히 뒤돌아보게 될 것이다

이 텅 빈 술집에 들어가면서 느꼈던 씁쓸한 고통은 분명히 기억하게 되겠지만 그런 저조한 기분의 원인이

친구라고 불렀던 에디 녀석의 배신과 파리에 체류 중인 아버지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을 것이다

대신 그는 기억을 조작하고 다시 해석하리라 술집 입구에서 느꼈던 쓰라린 기분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예감이었다고 그리고 그 심란한 마음 상태와 곧 그를 덮칠 사건 사이에는 모종의 운명적 관계가

있음이 틀림 없다고 말이다

그건 레몽의 생각이 옳다

그의 정신과 육체의 본능이 그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면 말이다

 

쿠레주는 재빨리 나이를 따져보았다

그녀는 마흔네 살이야 그때 나는 열여덟 그녀는 스물일곱이었으니까

날 알아봤을까?

 

17년을 열망해 온 이 기회를 헛되이 놓쳐버려서는 안 된다

17년간의 맹세 이 여자를 모욕하여 비참하게 만들고 자기가 어떤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다는 맹세는

아직도 유효했다 수년 동안 레몽은 어떤 상황에서 여자와 마주치게 될까 어떤 책략으로 옛날 자신을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여자를 울려줄까 상상해 왔던 것이다

만약 오늘 저녁 만난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열여덟 살 고등학생 시절 그의 인생을 스쳐 갔던 수많은 엑스트라

중 한 사람이었다면...그 마음속에는 애착도 혐오도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으리라

이미 그는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여자에 대해서라면? 그는 여전히 19**년 6월의 어느 목요일 먼지 나는 교외의 길 위에 이제

절대로 그를 위해서는 초인종이 울리지 않을 저 닫힌 정문 앞에 멈춰 서 있지 않은가?

마리아 마리아 크로스 바로 그녀 덕분에 발끈해서 수치심으로 가득했던 사춘기 소년은 한 남자로 거듭났다

아 그녀는 얼마나 변하지 않았는가 여전히 두 눈은 무언가 묻는 듯하고 이마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여자들은 성숙기에 다다를 때까지도 어린 아이의 얼굴을 간직한다 아마도 이런 영원한 유년기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박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서투른 애정 표현에 발이 묶인 채 부인은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나아가 팔을 뻗어보지만 그 몸짓은

남편에게 상처만 입혔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는 일정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늘 사랑을 위한 빈자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늘 해답을 발견하고는 했다  취소된 약속 시간이 지나가면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

약속이 바뀌지 않았다면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아닌가 내게는 아직도 기다릴 행복이 남아 있지

 

인생의 과도기에 있는 덜 여문 영혼에게 별것 아닌 놀림이 얼마나 큰 타격을 줄 수 있는가

 

이 애송이를 구원하려면 한 여자의 등장이 필요했으니까 이제 그녀의 등장이 임박했다

 

그녀가 박사를 성인으로 숭배할수록 그의 사랑은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박사의 열정은 마리아의 존경이라는 벽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마리아가 이 만남을 얼마나 지겨워하는지 박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레몽 역시 그녀가 말을 걸지 않을까 그녀와 어떤 사뢰적 관계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할

필요 없이 맘 놓고 여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행성을 관측하는 자의 고요한 집중력을 가지고

 

그 이마를 빛나게 하는 것은 술집의 불빛이 아니라 여성에게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지성의 빛이었다

그문 만큼 우리를 더 깊이 감동시키는 저 정신의 빛 이런 존재 때문에 우리는 사상이니 이상 지성 이성

같은 단어가 원래 여성형의 명사임을 상기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그가 겪는 고통의 엄청난 깊이와 원인의 하찮음 사이에 있는 이 불균형을 설명할 수 있을까

 

마리아에게 나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게 틀림없다

그녀는 나를 만나는 걸 거부했어

그녀에겐 내가 기다린다는 사실조자 아무 의미가 없었겠지

 

마리아 크로스의 최초의 눈길이 꾀죄죄하고 소심한 소년 안에 감춰져 있던 한 남자를 탄생시키는 이

신비로운 기적

 

레몽과 마리아는 표면적으로는 계속 침묵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만들 수 없는 질긴 그물을 둘 사이에 짜놓고 있었다

 

이 미지의 여인이 바라봐 주기 전에는 레몽은 한낱 지저분한 애송이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작품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만들 의도를 가진 적이 없다 해도

우리 운명을 가로질렀다가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모든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우리 속에 만들어

낸다

 

오늘 저녁 뒤포 가의 술집에 앉아 있는 서른다섯 살의 레몽 쿠레주가 만약 19**년 철학수업을 받는 학생이었을

무렵 하굣길 전차 안에서 마리아 크로스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즐거움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미친 희망을 키워왔었던 것이다 미친 정말 정신 나간 희망

사랑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는 나는 살 수도 없는데 그녀는 무심한 마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통고해 버릴 때 과연 논리적 사고 따위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나의 전부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마리아는, 진짜로 소년 또한 같은 마음으로 일요일 여섯 시의 전차를 탔었고 그녀가 없어서

실망했었다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자기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여자에게 푹 빠진 사람 보답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불행한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얼마나 가엾은 존재인가 그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사랑한다 해도 그녀는 그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처럼 우리에게 무관심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다

 

모르핀 주사를 맞듯 그는 일상의 근심거리들을 자신에게 투약했다

 

이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성장한 레몽의 모습

그날 낮의 사건과 레몽의 변화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 비밀은 자비롭게도 당분간 드러나지 않으리라

 

다행히 우리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어 같은 것을 좋아하고 같은 것을 싫어하지

어쩌면 같은 데 유혹을 느끼고 끌릴지도 모르지

 

만나지 못하고 엇갈렸던 저 일요일 오후 이후 둘은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혹시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내가 먼저 첫 발자국을 떼겠어 둘은 똑같이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기다렸는데도 마리아는 처음에는 다시 나타난 소년의 모습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소년이 그저 별일 아닌 것에도 곧잘 눈을 찌푸리는 애송이로 보였던 것이다

 

어쨌든 난 멀리 가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럼 오늘은 같이 걸어 가실래요?

우린 매일 함께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습관은 습관이니까

 

마리아는 소년의 새빨개진 뺨과 면도칼 상처가 난 젊고 어린 육체를 훔쳐보았다

어린 티가 완연한 자세로 레몽은 책가방을 허리께에서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세상에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잖아 갑자기 혼란스러운 감정이 죄의식과 수치심 감미로운 기쁨의 뒤범적 같은

것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마리아는 저속하다고 싫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앳된 소년의 입술에서 이런 말들이

흘러나오자 그 서투른 수작들은 오히려 싱그럽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름을 알고 싶어요

 

레몽 연령대의 남자에 대해 그녀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일반적으로 소년의 순수가 어느 정도의 나이에 더럽혀지는지 간혹 인생의 봄날도 진흙탕의 계절일 수 있음을

그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이 사랑스러운 소년이 자기를 멸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이

괴로울 뿐이었다

 

마리아의 위상을 정직하고 신실한 학교 선생 정도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기가 하게 될 영광스러운 정복 행위를 미리 김빠지게 하는 짓이다

 

자기를 매혹시키는 이미지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지만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 티 없는 천사의 마음 안에 실제로 어떤 고민이 오갔는지 마리아가 읽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레몽은 밤이고 낮이고 마리아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다음에는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머리를 싸맸다 가구가 갖춰진 셋방을 하나 얻어야 할까 전차 종착역 근처에 낮 동안만 방을 빌려주는

괜찮은 여관이 있다고 하던데 이런 식으로 설익은 바람둥이는 목표로 향하는 길 위에 포진해 있는 장애물들을

생각하며 암중모색을 계속 했던 것이다

 

내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무뚝뚝하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내 편지 받지 못했나요?

레몽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니콜라의 충고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널 엿먹이려는 거야 그 계략에 말려들면 안 돼 그녀가 뭐라든 신경 쓰지 말고 돌진해 봐

 

정욕을 지배하는 법칙은 예상 외로 매우 단순함을, 레몽은 게임의 일장에서 이미 간파할 수 있었다

누구의 충고 없이도 타고난 본능의 가르침에 따라 소년은 여자 혼자 안달복달하도록 놔두기라는 사랑의

첫 번째 규칙을 충실히 실행해갔다 나흘간이나 기다려도 레몽이 나타나지 않자 마리아는 초조해져서

스스로에게 비난을 퍼붓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대상이 끝도 없는

혼란과 동요를 다 겪은 지금에야 그러나 이런 사실이 레몽에게는 불운으로 작용했다 마리아는 첫눈에

벌써 환멸을 느꼈다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오래도록 그리워했고 갈망했던 대상이 실제로 나타났지만

그가 자기의 엄청난 공허를 채워주느 못하리라는 것을 단숨에 깨달았던 것이다

 

레몽은 웃지 않았다 굴욕을 당한 이 젊은 수컷은 예상외의 실패에 격분해 있었다 자신의 육체적 힘에

대한 막 부풀어 오르던 자만심이 갑자기 급소를 맞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남은 생애 내내

레몽은 한 여자가 자기를 혐오스럽다는 듯 내치면서 거부한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여자를 정복한 이후에도 또 그녀들을 모두 비참하게 복종밖에는 할 줄 모르는 희생양으로 만들고

나서도 이날 겪은 최초의 굴욕은 타오를 듯한 화상 자국으로 남아 옅어지지도 않았다

 

마리아가 웃었던 것은 이 예민하고 자존심 강한 소년을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 내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감추기 위한 방어적 연기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아 마리아는 아직도 눈앞에 있지만 레몽은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부터는 하늘의 별을 건드리지 못하듯이 그녀를 건들 수 없으리라

바로 그 순간에야 소년은 마리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다

과연 운명이 이 아름다운 과일을 허락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이

실과를 따 먹을까 하는데만 몰두해서 레몽은 여자를 제대로 바라보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기회는 지나갔고 그는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졌다

 

박사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단순히 마리아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몽의 고통은 더 처참했는데 사랑하는 여인이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사랑으로 한 남자의 창조에 착수했고 지금은 자기 창조물을 멸시하여 내버림으로써

과업을 완성한 셈이다

 

마리아 덕분에 한 남자가 태어나 세상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 크로스에게 거부당했다는 쓰라린 기억을 간직한 채

이제 그 어떤 여자에게도 거부당하지  않는 남자가 됨으로써 자기를 증명하려는 강박관념을 가진 한 남자가

이렇게 해서 레몽이 구사하는 사랑의 계략 안에는 음험한 증오심이 여자를 완전히 예속시켜 상처 입히고 고통으로

신음하게 만들려는 욕구가 스며들게 되었다 아마도 숱한 낯선 여자들의 얼굴에서 그가 찾았던 것은 바로 마리아

크로스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레몽이 천성적으로 사냥꾼의 본능을 타고난 것은 틀림없지만 만약 마리아와의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성향은 좀 더 완화되어 나타났으리라

 

마리아는 박사가 사춘기 이래로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방식 이 추억의 표지판을 따라가면서 박사는 사랑에 빠질 때마다 매번 비슷한 감정이

엄습했던 것을 깨달았다 이 감정에 하도 지치고 익숙해져 이제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그러한 멍한 상태로...

하나같이 허무하게 끝난 사랑 박사가 스무 살이었다고 해도 그와 그 여자 사이에 가로놓인 사막을 더 쉽게

뛰어넘는 방법을 알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대상에 가닿지 못하는 것 이것이 그의 본성의 법칙이었다

 

가장 거세게 정염에 타오르는 동안에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춘다

그러나 그 격정의 쾌락을 포기하고 우리가 영원히 배고프고 목마를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는

그렇게 기진맥진할 만큼 속마음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유일무이한 대상에 가닿겠다는 게 얼마나 미친 희망인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존시킨다 그들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그래서 죽음은 사랑을 썩지 않게 보존하는 소금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로 사랑을 분해시키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삶이다

 

한 여자가 우리 안에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그걸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고 하자

가혹한 운명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녀가 만들어낸 앞으로 절대로 변할 가능성이 없는 그 단단한 상에 영원히

묶이게 된다 이 화학 법칙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 뒤로 우리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똑같은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흔히 그것이 우리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수치스러운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크로스의 시선이 닿자마자 레몽 쿠레주는 민감한 사춘기 소년으로 퇴행해 버렸다

이런 상태로는 즉각적인 복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마리아에게 자기의

화려한 연애 경력과 빛나는 정복의 역사를 알려줄 기회가 있지 않을까 바라는 정도였다

마리아 크로스에게 자기가 얼마나 다른 남자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것 그 옛날 레몽 혼자 있고 싶어요 이해해줘요

라며 자기를 내쫓은 그녀에게 이를 간 이후 자기가 얼마나 수단 있는 정복자로 변모했는지 보여주는 것

 

그 시절 제가 좀 미쳤던 것 같아요 당신 같은 어린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다니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어요 그 일이 내게는 얼마나 먼 과거의 일인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마리아는 당시 자기가 죽으려 했었다는 사실을 그가 아는 지 궁금해졌다

아니 레몽은 모를 것이다

 

그 시절 난 내 안에 갇힌 채 살았어요 부질없는 생각을 하느라 기나긴 시간을 보냈어요

지금 당신이 추억하는 그 여자는 마치 나 아닌 다른 여자같이 느껴져요

그런데 그 바보짓이 제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고 믿었나요?

 

그래 나는 그 일이 그녀의 인생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레몽은 이런 식으로 사춘기 시절에 일어난 저 초라한 사건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새롭게 아파올 줄은 몰랐다

 

레몽은 몰랐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한때 마리아는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녀는 레몽을 사랑한다고 믿었었다 레몽이 그렇게만 어리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어른이었더라면 레몽도 여자가 바라는 대로 천천히 시간을 두고

접근했으리라 둘은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그 전차 기억하세요?

전차? 무슨 전차 말이에요?

 

예순아홉 아니 일흔인가 저 나이에도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니

레몽은 갑자기 자기가 입은 상처가 떠올랐고 겁이 덜컥 났다

과거의 애인 중 한 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에 빠지면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면 난 화가 나요 그래서 사랑이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리지요 오늘은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내일이 되면 모든 게 변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내게 그토록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언젠가는 쳐다볼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 될 거니까 사랑하는 것은 끔찍하게 힘든 일이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17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다

 

많은 가족을 책임지며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넌 모를거다 식구들의 수만 가지 걱정거리를 짊어진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그게 좋은 건 그 자잘한 일들 때문에 내적인 심각한 상처는 잊게 되니까 말이야

 

마리아를 다시 만난 것이 결국 화근이었다 절대로 다시 보지 말았어야 했다

지나간 17년간의 수많은 연애는 자기도 몰랐지만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꺼뜨리기 위해 놓은 맞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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