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어쩌다 어른 - 이영희

by librovely 2015. 11. 29.

 

 

 

어쩌다 어른                                                      이영희              2015                 스윙밴드

 

 

읽은지 오래되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재밌었다는 기억은 난다

발췌를 해보니...이 분은...자학 철학의 선구자...무척 공감이 가는 부분...

다시 봐도 재밌다

좋은 책이다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혹은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좇으며 사는 게 행복한가

아니면 썩 즐겁진 않아도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하며 인정받는 게 행복한가

결국 둘 사이 어디쯤에서 적절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게 대부분의 인생 아닐는지

 

지금의 나란 어차피 과거의 나 과거에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시절을 돌아보지 않으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길이 없다

강상중 교수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 인생이란

내 과거 이니 나는 과거로소이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업무상 을로 살아가는 나와 진짜 나를 혼동하지 말 것

 

무언가를 결정할 때 망설임이 많고 시작도 해보기 전에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느라 엉거주춤하는 시간이

긴 건 내다버리고 싶은 성격 중 하나이다 반면 길고 긴 고민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포기는 재빠른 이상한

성격이다 연애도 일도 원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 판단되면 일찌감치 항복을 선언했다 어떤 일을 시작했는데

영 흥이 나지 않고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쉽게 손을 놓았다

 

어쩌면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그 명확한 목적의식이 우리를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한동안 가장 가까웠던 누군가가 이제는 마주칠까 두려워 길을 돌아가야 하는 그런 사이가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카피를 처음봤을 때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돌리고 싶어졌다 진짜 그런거야? 그럼 나는? 음...떠오르지 않는군 그냥 생각을 말자

얼마 후 선배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들킨 듯 피식 웃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입니다 우리 중 인기 있는 누군가는 여러 사람의

첫사랑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남녀문제에선 독특한 취향이나 내 맘 나도 모르겠어 식의 끌림 같은 계급 간 화해의 가능성을

높이는 미스터리한 조건들이 존재한다는 게 희망이랄까

 

돌아보면 내가 일본 문화에 빠져들게 된 것고 누군가에게 옮은 취향이었다

주말마다 집에 틀어박혀 일드만 보고 있는 그를 구박하다가 싸우느니 차라리 같이 보자로 시작했다

결국 그와 이별 후 급격히 한가해진 주말 어느새 일드를 벗 삼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그렇게 남겨진

다른 사람의 취향은 자가증식해 결국 일본에서 한번 살아보겠다는 결심까지 하기 되고야 말았으니

내가 좀 멀리 간건가

 

여자들의 우정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거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하고

거의 모든 감정을 나누고 (있다고 믿고) 나의 칭얼거림을 시도때도 없이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만나서 차 마시고 수다 떨 친구 같은 거 없으면 어때 싶었다 삼십대가 되자 다들 바빠졌다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각자의 가정을 꾸리느라 내게 내어줄 틈이 없어졌고 싱글인 나는 마감과

음주 사이를 오가기에도 늘 시간이 빠듯했으며 몇몇 친구는 꿈을 찾아 먼 나라로 훌쩍 떠나버렸다

 

사랑이 상대방이 가진 것에 끌려 시작된다면 우정은 상대방의 결핍을 알아보며 시작된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부류는 늘 경쟁하려 드는 여자들이다

 

세상은 자주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루는 고되고 희망은 흐릿하다

이런 일상 사소한 취향과 실없는 농담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나의 웃음 탐닉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남들을 웃기는 귀한 재능은 타고 나지 못했지만 웃음의 역치가 매우 낮아 시시껄렁한 농담에도

쉽게 웃음이 터지는 재능만큼은 출중하니 웃음으로 구원될 복된 세상의 기쁜 백성으로는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며

 

그 시절의 나는 뭐가 그리 힘들었던 것일까 서른 즈음에는 무언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닌 누구이고 싶은데 내가 나여서 슬펐던 시절 당시의 싸이월드를 뒤지다 이런 오그라드는

글을 발견하고야 만다

나도 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하지만 내가 나라서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아니고 싶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나라서

내 몸으로 내 머리를 받치고 서 있는 나라서

정말 도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리가 없다

나도 안다

 

때 늦은 사춘기가 찾아왔다 빌어먹을 세상 욕을 해봐야 소용 없고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이런 세상에

내 자리를 없을거야 누가 날 좋아하겠어 난 안 될 거야 아마 헤매던 시절 그 때 그 안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내 상황을 남 일 보듯 하기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냉정하게 파헤쳐 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기 아마도 자학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학이란 세상과 맞붙어 싸우기에는 힘이 모자란 이들의 한 발 앞선 포기 선언이자 내 기대를

너무 쉽게 배신해버리는 이 세상에 대한 소심한 복수다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유난히 루저들의

자학 개그에 끌렸던 것인지

 

자학은 재밌다 그리고 이미  상처받은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는다 자학은 이 세계의 부조리를

그 속의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알고 한계를 직시하며 그럼에도 더 나은 자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 진짜 어른들의 놀이가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적어도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식의 착각보다는 훨씬 성숙한 자세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좋아했던 것도 그가 자조와 자학 끝엔 언제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였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이것밖에 안 돼 라고 읊조리다가도 나는 매일 조금씩 단단해져라고 노래하는 이라서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객체화해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비슷한 감성을 가진 이들과 낄낄대는

시간 이만큼 알찬 인생의 재미를 찾기도 수월하진 않을 것이다

하여 나는 앞으로 조금 더 깨알같이 조금 더 참신하게 능력이 허락하는 한 부지런히 자학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나를 바닥까지 사정없이 팽개치고 나면 그런 나 자신을 쳐다보며 웃노라면 주섬주섬 일어날 힘도 생겨나겠지

뭐 어쩌겠어 아님 말고

 

생애 처음으로 한없이 여유롭고 희망적인 날들을 보냈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오그라들던 마음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누그러졌다 괜찮아 나는 곧 일본에 갈 사람이니까 그곳에 가면 지금과는 다른

생활 다른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새로운 나 같은 건 없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이런 나를 어딘가에 옮겨놓는다 해도 삶이 극단적으로 바뀌진 않는다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떤가 중요한 건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줄 사람 결점까지도 능력의 한 단면으로 이해해줄 누군가를

갈구한다 제발 여기를 좀 봐 줘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나를 좀 발견해줘

 

팀 버튼 감독이 만든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남들과는 달라 슬픈 존재들이 나온다

감독은 말한다 삶이란 궁극적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건 대단히 긍정적인 방식의 비극성이다

살다보면 비극적인 일을 수없이 겪게 마련이고 그게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비극을 재미

있게 표현하는 일이 좋다

 

왜 연애를 하고 싶으세요?

어 그게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음 하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아직 멀었네요 저도 그런 때가 있었죠 용기를 갖고 혼자 연말을 견뎌내다 보면 그렇게 몇 년 계속해보시면

혼자 조용히 보내는 연말의 기쁨을 아실 날이 올 거예요

 

이 땅에 살고 있는 소위 번듯하다고 일컬어지는 삼십대 이상의 남자들과 수차례 소개팅을 하면서 이 세상엔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하나의 족속이 더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자신 외에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 존재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사람들 농담으로 자웅동체라 부르곤 했다

그들의 특징이란 대체로 예의바른 편이고 여유로우며 잘생기지는 않았어도 적절히 가꾼 외모를 가졌으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고 그 중 일부에 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추어 남 앞에서 드러내길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는 것 등이다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의 <서른 넘어 함박눈>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혼자 산다는 건 어렵다 오해받기 쉽다

고영오연(외롭고도 도도한 모습)하게 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한다

그러나 또한 어딘지 조금 애처로운 데가 없으면 얄밉게 보인다

그러나 또한 너무 애처로운 티를 내면 색기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균형이 어렵다

 

도쿄는 혼자 살기에 최적의 도시이며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가 쓴 <고잉 솔로-싱글턴이 온다>라는 책을 읽다가 공감한 부분이 있다

수명 연장의 시대 누구라도 언젠간 싱글턴(독신자)이 될 것이며 비참한 싱글턴이 되지 않으려면

일상을 홀로 감당하는 신체적 감정적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묻는다 너의 고민은 뭐야?

남자가 답한다 너

로맨스 영화 가운데 가장 심쿵하게 만든 대사를 고르라면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오는 이 대사를 꼽겠다

 

가끔 의미 없음의 결정체였던 타국 도시에서의 느릿한 걷기가 그리워진다

잉여로움의 결정체 같던 그 시간이 거꾸로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갖게 해준 건 신비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