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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시뮬라시옹 - 장 보드리야르

by librovely 2008.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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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1992'                민음사




책 제목이 약간 어려워 보이는 책 이더라도 사실 읽어보면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내가 몇 권 읽은 제목이 뭔가 있어? 보이는 책들이 그랬다.
아마도 그 책을 쓰신 학자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썼기에 그랬겠지?
그런데 이 책은???
어렵다....ㅡㅡ;;
읽어본 책도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하여튼 내 독서인생 (떨렁)2년 통틀어 이 책만큼 난해한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시뮬라르크...시뮬라시옹...이라는 말은 일단 진중권의 글에서 좀 보았었고 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한 해설이 쓰여진 블로그를 여기저기 흘러다니다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매트릭스...그 영화에 대한 글에서도 봤고....
매트릭스 감독이 출연자들에게 이 책을 두 번인가? 하여튼 몇 번 꼭 완독하고 나서 촬영에 임하라고
명령?을 했다고 하니...연관이 깊겠다....


책을 대출받으러 가서 찾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그 자리에 없다...알고보니 서고에 들어갔다는...
그만큼 오래된 책이고 또 그만큼 빌려보는 이가 별로 없었다는 말 이겠지...
사실 이 책은 빌린지 거의 두 달 가까이 되었다... 대출증 동생 꺼랑 내 꺼랑 두 개를 갖고는 번갈아
대출받는 편법을 사용하여...(그닥 죄책감은 없다...빌릴 이도 없을 책이며 서고에 들어간 책 이기에
나중에 다시 빌릴려면 직원이 고생한다...고 합리화 시키고 넘어가자.) 그러나 이 것도 한 두번이지...
반복 대출을 하는 것이 길어지니 살짝 민망...어쩌겠어....


처음 대출 받은 때에 100페이지 좀 넘게 의미도 모르고 막 읽어댄 후 그 다음은 찔끔찔끔....
오늘 마지막 40여 페이지를 그냥 완독에 의미를 두고 무조건 읽어 내려갔다...
가뜩이나 어려운 내용...더욱 이해가 안가시고 계신다...
다음에 또 읽지 뭐... 이런 책은 사서 봐야 할 것 같다...한 번 읽고 해결이 안 되니....


느낌을 쓸 여력이 없다....
내용이나 베껴 적어가며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할만한 것이 잔뜩임은 확실하다...
요즘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아마도 이 책의 내용을 잘 이해했다면 훨씬 깊어졌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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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르크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르크는 참된 것이다.
-전도서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곳,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그 곳, 이것은 질서.
-브레히트



시뮬라르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시물라시옹은 시뮬라르크의 동사적 의미. 시물라르크를 하기 이다.(역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겠다는 사실주의적인 기법의 비사실성이 여기에 있다.
가장 사실주위적인 기법은 가장 환상적이다.(역주)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열리고 모든 지시대상은 소멸되어 버린다.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하는 것이다.
시뮬라르크하기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하기이다.
전자는 있음에 속하고 후자는 없음에 관계된다.


거짓과 참을, 만들어진 징후와 진정한 징후를 구별하기 주저한다.


이미지가 원래의 모델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미혹으로부터 영구히 빛을 발하는
완벽한 시뮬라르크였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어떻게든 신성한 지시물의 죽음을 피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기호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고 있는 기호로의 이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인종학이 살기 위하여는 그의 대상이 죽어야 한다.
한 과학의 논리적 진화는 그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항상 더욱더 멀어져서 결국은 그 대상이 없어도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실재보다는 오히려 가장된 것 시뮬라르크를 더 좋아하는 사회에서 실재가 모두 사라지고 난 다음에
시뮬라르크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사라진 실재의 인위적 부활과 실재감의 부활이 향수처럼
일어난다. (역주)


사회 전체가 광기에 젖어있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어떤 사람들을 따로 떼어 미친
사람의 표준을 삼아야 한다.
실제로 광기의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광기란 시대에 따라서 그 규정된 범주가 다르다.
광기란 그 사회가 감추고 있는 다른 모습일 따름이다. (역주)


디즈니 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 랜드 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


결핍을 퍼뜨리는 것은 결코 자연이 아니라 시장경제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스캔들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건 스캔들이 아니라는 것을
감추려고 애를 쓴다.


스캔들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은 자본 뒤에는 도덕이라는 배경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과 동일하다. 지금까지는 자본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왔는데 이 결합이 깨지면
권력의 정당성이 상실되기 때문에 이 결합의 부재를 숨겨야 한다. (역주)


자본의 순간적인 잔인성,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그의 근본적인 부도덕성 이게 바로 스캔들인
것이고 계몽사상 이래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좌익 사상의 공리인 도덕과 경제의 등가 체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자본은 괴물 같은 기업이다. 원칙도 없으며 오직 한 가지, 그게 전부다.
자본 자신은 정작 그가 지배하는 사회와 결코 계약에 의해 맺어져 있지 않다.


좌파는 혼자서도 그리고 자발적으로 우파의 일을 아주 잘해 준다.
그 까닭은 우파 역시 자발적으로 좌파 일을 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조종의 시뮬라르크들은 끝없는
돌림대 속에서 다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이 서로서로를 생산


시뮬라시옹의 지옥
이건 더 이상 고문의 지옥이 아니고 의미의 교묘하고 저주스러우며 포착할 수 없는 뒤틀림이다.


아나모르포즈
합리성의 변두리로 무의식과 기괴함을 즐기는 왜곡된 시야로서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에 의해 내밀히 전수
세익스피어로부터 시작하여 루소, 프루스트, 끌로델, 초현실주의자들, 누보 로망의 작가 끌로드 시몽
비평에 있어서도 롤랑 바르트, 미셸 뷔토르, 죠르쥬 라이야르, 정신분석학자 라캉 (역주)



권력은 기꺼이 위기의 담론을 사용한다. 또 욕망의 담론을 사용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현행의 담론속에서는 사회 자체가 대재난 영화의 각본에 따라 조작된다. (역주)



제임스딘, 마릴린 몬로, 케네디 등은 실제 권력이 있거나 대표하낟고 믿어진 사람들이기에
죽고 나면 그들의 권력에 대한 회고적인 신격화와 우상화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권력과 우상의 상징으로써 다시 부활할 행운을 누린다. (역주)



권력은 자신이 더 이상 없음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에 있다. 끝없이 지속될 시뮬라시옹이다.
노동 시나리오는 노동의 실재, 생산의 실재가 사라졌음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


의미의 과도한 투명성은 오히려 의미 그 자체를 삼킨다. (역주)


아나그람, 아나모르포즈,회화의 꼴라주,  TV와 영화의 몽타주는 기호 조작에 의해 작용하는 기법(역주)



모델을 모방하여 모델과 같이 되라는 명령 혹은 설득이기에 여전히 중심이 있고 재현할 것이 있다.
그러나 사실성의 효과를 주기 위하여 TV가 몰래 카메라나 거리의 인터뷰를 통해서 실제의 모든 것을
시뮬라르크로 만들게 되면 모든 것이 이미 모델 혹은 가능한 모델이기에 실제를 폐지하고 저지한다.(역주)


모든 것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으로 되돌아간다. 바로 이 멋진 반복 사이클과 함께 조작된
보편적 시뮬라르크가 대중선거의 시나리오로부터 여론조사라는 현행의 환영에 이르기까지
자리잡기 시작한다.(원주)


생활 속에 TV 용해와 TV 속의 생활의 용해


핵에 의한 초토화의 위험은 무기를 첨단화함으로써 안전, 차단, 통제의 보편적 시스템을 설치하기 위한
핑계로 사용될 뿐이다.
공포의 균형이란 균형의 공포이다.
핵 궤도 위에서 순환하는 파괴 화폐는 모든 폭력과 지구의 잠재적인 분쟁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하다.
극대 통제 시스템
혹성 통제 시스템의 모델적 벡터가 되는 것
(원주: 모든 폭탄은 깨끗하다. 그들의 유일한 오염은 폭발하지 않을 때 그들이 조사하는 안전과 시스템이다.)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평화화는 전쟁과 평화의 너머에 있다.
전쟁은 곧 평화이다.
핵 확산은 핵 충돌이나 핵 사건의 위험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깨끗한 환각이 바로 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화들의 대부분은 이미 이러한 계통이다. 베리린던이 가장 좋은 예이다.
역사는 강한 신화였다. 어쩌면 무의식과 함께 최후의 거대한 신화였다.
영화는 환영들만을 부활시킬 따름이고 거기서 영화 자신이 상실된다.


학살을 비난한다고 하는 형태 자체 속에서 소위 축출한다고 하는 중간매체 자체, 텔레비젼의 형태
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중... 이 학살을 다른 종으로 영구화하는 것이다.
TV에 대한 사회적 무감각
당신이 화면이고 텔레비젼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역주:TV는 현실을 시뮬라르크로 만드는 기능이 있다.)


미국인들에게 전쟁은 우선 이런 것 이었다.
일종의 시험대, 즉 그들의 무기와 방법과 힘을 시험해 보는 거대한 영역이었다.



원자력 발전소의 진짜 위험은 불안전, 오염, 폭발이 아니고 발전소를 중심으로 방사되는 극대의 안전
시스템, 모든 영토 안에서 더욱더 밀집하여 펼쳐지는 통제와 저지의 얼음장처럼 평평한 면
기술적인 환경 보호론적인 경제적인 지정학적인 평면이다. 핵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보부르는 문화의 저지적 기념물이다.
문화 죽음의 작업이며 대중들이 즐거이 초대받았던 곳은 진정코 문화 장례식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곳으로 몰려든다.


대중집단에 세공되어지고 이 집단의 너머에서는 상품이 파생상품이 되고 문화는 파생문화가 된다.
사회성이라는 것에 종말을 가해 버리는 대중덩어리,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라고 믿게 하려고 하는 이 대중덩어리는 반대로 사회적인 것이 함열하는 장소이다.


공장, 대학은 더이상 공장도 대학도 아니다.


정보는 더욱 많고 의미는 더욱 적은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보가 의미를 생산한다고 생각한 그곳에서 반대의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보는 자신의 고유한 내용물을 삼켜버린다.
정보는 의사소통과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린다.


파생실재성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실재를 폐기한다.



모가디시오-스탐하임
매체들이란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는 공포착취와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운반체이지만
동시에 가장 전적인 모호성 속에서 매체들은 테러적인 행위에 대한 생경한 미혹을 전파하고
그들 자신들이 미혹으로 작용하는 만큼 자신들이 테러주의자들이다.
(영원한 도덕적 딜레마, 움베르트 에코와 비교하자.
 어떻게 테러리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매체들을 좋게 사용할 방법을 찾을까? - 그 방법은 없다.)


사고는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삶을 전략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의 입문이다.


사진과 영화의 차원
순환과 사고의 포화되고 빛나는 표면은 깊이가 없다.
카메라의 눈이 시간을 대체하고 이와 같이 하여 다른 모든 깊이, 애정, 공간, 언어의 깊이를 대체한다.


시뮬라르크의 세 가지 질서 : 이미지, 모방, 위조


실재의 주어진 바로부터 출발하여 비현실, 상상적인 것을 만드는 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그 과정은 차라리 거꾸로일 것이다.


정신적 질환이 신체적 질환으로 바뀐 동물들은 오늘날 심리 언어를 말하도록 그들의 심리현상과
그들 무의식에 있어서 잘못된 것에 대하여 대답하도록 요구된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것과 같다.
우리의 운명은 그들의 운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특권을 온 힘을 다해 세웠던 인간성에 대한 일종의 씁쓸한 복수이다.


우리는 동물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우리는 그들에 대해 인간적이다.


근본적으로 동물들이 겪은 단계는 광기, 유아기, 성 또는  흑인들의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겪은 단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결국 필연적으로 되돌아오는 회귀의 논리이며 사회 전체가 결국은 광기, 유아기,
성 그리고 열등한 종족들의 공리 위에 정렬하도록 하게 하는 회귀의 폭력이다.
이 과정은 우선 제거하고 다음에는 사라진 종족들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들의 사라짐에 대한
자백을 제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실재는 실재보다 더 실제적인 이미지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하여 사라져 버리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노동은 노동을 매장하고 가치는 가치를 매장한다.


체제는 이 죽음 시뮬라르크의 교활함을 통하여 우리를 산 채로 유지한다.
오직 더 우월한 교활함만이 이 시스템의 교활함의 방어를 할 수가 있다. 도전 혹은 상상의 과학,
시뮬라시옹 전략으로부터 시스템이 우리를 가둔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우리를 빠져 나오게
할 수 있다.



★★★★★



발췌를 하며 느낀 점...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상식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상식이 아닐 확률이 아주 높다...??
속아온 느낌이 든다... 뭘 어떻게 속은 건지 정확히 알려면 아무래도 이데아 총서?류의 책을
이해가 되든 말든 어찌되었든 열심히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근데 상식이 상식이 아니었음을 안다고 해도 뭐가 달리지기나 할까?
짜증만 밀려들지 않을까.....
(이건 뭘 깨닫기나 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겠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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