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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은교 - 박범신

by librovely 2013. 10. 16.

은교                                                                                            박범신                     2010          문학동네

 

읽을 생각을 안했다

이미 영화를 봤고 크게 다를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영화가 너무 좋았기에 소설을 보면 왠지 실망할지도 몰라...하는

생각도 들었었다...박범신의 소설도 접한 적이 없다...난 책을 읽는다고 읽어대도 유명한 작가 중 아예 접해보지 못한

작가가 수두룩하다....진작 좀 읽었어야 해.... 세상은 넓고 읽을 책 아니 읽어야할 책은 너무 많다...

 

박범신은 은교 열풍(?)탓인지 힐링 캠프에서 잠깐 봤었다..나이 많은 작가이지만 뭔가 나이듦에서 느껴질법한

답답하고 경직된 지루하고 뻔한 그런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학창시절 미친듯이 책만 읽어대서 책을

끊으라고 부모님이 절에 집어 넣은 적도 있다는 이야기...평범하지 않았구나 역시...

어쨌든 그래도 뭐 별 기대가 되지는 않았는데...

 

도서관에 갔다가 은교가 눈에 들어왔고 어디 한 번~ 하며 집어 왔고 읽을까 말까 하다가 펴 보았는데...

그렇게 펴든 책은 읽다가 잠들었고 그 다음날까지 계속 읽어서 다 읽음...

책을 한 번에 읽는 편이 아니라 이거 읽다가 저거 읽다가 ADHD 돋게 정신산만 이책 저책 읽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은 손에 들고 쭉쭉 읽어댔다...읽으면서 다르구나 글이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정말 잘 썼구나

 

문장 하나하나가 다르다 내가 뭘 알겠느냐만은 여태 읽은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문장 자체가 마음에 와 닿았다

박범신이 한국인이니까 이게 가능한거다...번역한다면 이 맛을 제대로 느끼긴 힘들겠지

같은 내용도 찌르듯 다가오고 마음 속에 깊이 박힌다 어떤 부분은 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내용이 자칫 잘못하면 삼류 경박한 로맨스로 지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내용이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난 로맨스는 내가 구경(?)해 본 로맨스 중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임....

 

영화 내용과는 좀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예쁜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영화가 낫고 현실감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소설이 더 그런 면이 있는 거겠지

일단 말초적인 것들에 정신 팔리는 나에게는...

서지우가 자주 들락거리던 여자 나오는 술집 설정과 이적요 시인이 젊은 시절 매춘도 했고 중년 시절에는

어떤 이혼녀가 나중에는 정신과 의사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적요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와 성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었다는 설정이 다소 충격적...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는데 이런 게 현실이니까 그렇게 쓴 거겠지

하여튼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 게 좋았다고 생각한다...다르게 찍은 건 아니지

어떻게 보면...그냥 그런 것들을 생략했다는 게 맞겠지...또 이적요가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영화에서는 확실히 나오지 않는다 또 이적요가 은교를 보면서 첫사랑이던가 어쨌든 어린 시절 자신을 안아준

어떤 여자를 연상시킨다는 그런 것도 음...안 좋아...뭔가 싫다...하지만 그것 또한 현실적인 설정인걸지도?

 

그리고 뭔가 이야기 순서도 영화와 좀 다른데 영화에서는 첫 부분에 나이 든 자신의 몸을 보고 이적요가

한숨짓는 장면이 나온다...나이듦에 대해 압축적으로 그대로 보여주는데 별거 아닌 그 부분이 아주 인상적

그래서 같이 본 애와 가끔 그 장면을 따라하며 웃어댔었는데 아직도 그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남...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이 은교를 만난 이후에 나온다...영화에서는 만나기 전에 나오고...

근데 영화 설정이 더 좋다...물론 책도 나쁘지 않지만...

 

또 하나 다른건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여버리겠어! 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영화에서는 은교와 같이 있는 서지우를 보고

화가 나서 그런거고 소설에서는 은교를 만나러 간 이적요에게 늙은이가 내 여자친구에게 뭐하는거냐며

욕지거리를 한 게 알고보니 서지우 단골 술집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적요가 화가 나서 그렇게 결심을

한거고...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끄덕여지는 이유...

 

또 다른 건...

영화에서는 이적요가 젊은이가 되어 은교와 구애행동(?)을 하는 상상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설에서는 은교가 어렸다가 나이들었다가 하며 은교의 나이가 변하는 상상을 한다...은교가 나이가 들어 배에

살이 좀 붙기도 하고 뭐 그랬다가 다시 어린 은교로 돌아왔다가 그러는데...이 또한 영화처럼 이적요 나이가 젊어지는

설정이 더 맘에 든다... 어린 은교도 늙을 날이 올거야...보다는 나이 든 이적요지만 그 안에는 젊은 이적요가 살아있다

겉은 나이들었으나 마음은 그러하지 않다는 비극...이 더 맞지 않겠는가 그 장면이 아름답기도 했고 상당히 애틋하기도

했다...저렇게 같이 어릴 때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그런 마음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도 영화에서는 그냥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소설에서는 액자 구성...이적요는 이미 죽은 상태고

그의 유서와 남긴 글을 변호사가 읽으면서 이적요와 은교 그리고 서지우의 과거를 하나 하나 보게 되는 구성

 

영화를 안 보고 책만 읽었어도 정말 재밌고 좋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책 자체도 너무 좋다..그러나 매끄럽고 받아들이기 좋은 아름다운 이야기 면에서 생각하면 영화가 낫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 소설을 부담없이 받아들이기 좋은 방향으로 퇴고한 그런 느낌이고

소설은 뭔가 좀 더 날 것을 만난 그런 느낌이...각각 장단점이 있고 그래서 둘 다 좋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면에서는 영화가 낫고 더 마음을 찌르는 가끔은 불편하지만 더 큰 감동을 주는 건 책

보통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면 상상의 여지가 줄어들어 곤욕스럽지만 은교는 그래도 상관없다

이적요 은교 서지우...캐스팅이 정말 적절하다...그래서 오히려 소설이 더 잘 읽히고 더 잘 상상되고 그랬다

 

박범신은 이 소설을 한 달 반 만에 다 썼다고 한다

밤에만 썼으니 밤에만 읽으라고 한다

이런 천재같으니...

그렇게 빨리 쓸 수 있던 건 아마도 이 소설에 드러난 그 감정들이 이미 작가 속에 존재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아무 경험없이 이런 소설을 쓰지? 그럼 살인에 대한 책을 쓴 작가는 다 살인의 경험이 있겠네?

그러게 말이 안되는 말이구나...그러나 나는 정말이지 이런 소설을 비슷한 경험 없이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아이고 궁금해라...

 

이 책에서 중요한 설정은 아마 나이차이일 것이다

52살의 나이차이...

이성간의 연애 감정에 나이가 무슨 의미일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자면...이건 자주 하는 생각인데

누군가가 좋다... 그럼 그 사람이 20살이면 좋고 30살이 되면 갑자기 싫어질 수 있나? 그런 건 아니지...

정말로 누군가가 좋다는 건 물론 외모도 포함되겠지만 전적으로 그 사람의 전존재 자체가 좋은거라면

나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닐거다...라고 생각하는데...그런데...

 

사실 이 책에서 은교에게 이적요가 끌리게 된 이유는 그녀의 생각이나 어떤 행동 말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단지 잠들어 있던 그녀의 육체...하얀 피부와 그 피부에 비쳐 보이는 핏줄과 숨 쉴 때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가슴팍과 휘어진 허리 라인...이딴(?) 거에 이적요는 마음이 동하기 시작한거다...이게 뭐람...ㅜㅜ

그럼 은교는?

은교는 언제부터 이적요를 좋아하기 시작한건지 책에서는 잘 모르겠고 영화에서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연필 이야기...? 물론 처음부터 호감이 있긴 했는데 연필 달각거리는 소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나중에 거울...은교의 거울을 줍기 위해 이적요가 위험한 곳까지 갔을 때 아마 은교는 뭔가 느꼈을듯

아니면 은교도 처음부터 좋았던 것일지도? 영화에서는 은교가 아무것도 모르고 담을 넘어와 자는 것처럼

나오지만 책을 보니 은교는 이미 그 집에 대해서도 이적요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던데...

어쩌면 이적요의 시나 뭐 그런 것을 보고 연애 감정은 아닐지라도 호감 정도는 지니고 있었던 것도 같고...

하여튼 은교 외롭고 삶이 힘들었던 은교는 아마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마음이 통하는 이적요에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이적요는 은교의 겉모습에 마음이 시작된거고...은교는 속마음에 시작된거고

그러다가 나중에 이적요는 은교의 성격이나 그런 것도 좋았을 것이고 은교는 나이가 들었으나 이적요의

나이든 외모에서 나이든 것을 빼고 바라보게 된 것일 수도 있다...뭐 그렇다고 하지 않나? 좋아하면....

좋아하면 상대방 외모의 나쁜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미친 상태니까 안될 게 뭐 있겠어...

 

쓰다보니 또 책과 영화가 달랐던 게 생각난다

책에서 은교는 상당히 글래머러스한 여인으로 나온다

원래 소녀적이라는 건 좀 빈약하고 왜소한 그런 모습을 연상시키는데...그래서 영화 속 은교처럼

그런 몸이 정확히 소녀적인 느낌을 주는데 소설에서는 다른 묘사는 다 영화 속 은교와 같지만 그 부분만 다르다

그리고 은교가 생물학적인 처녀가 아니라는 것도 소설에는 나오는데...물론 영화만 봐도 그럴거라는 건 알 수 있지만

소설처럼 그렇게 굳이 짚고 넘어가지는 않는데...근데 그런 게 중요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니까 소설에서는 그랬던거고

하여튼 뭘로 보나 소설이 영화보다 현실적이야...

 

또 생각난다...아 끝이 없네...

영화에서 비 오는 날 젖은 교복 상태로 이적요를 은교가 찾아오는 장면은 초반부에 속하는데 책에서는 약간 뒷부분

이 또한 영화 속 설정이 더 자연스럽다...그런 뭔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이적요의 마음이 더 흔들리게 되는 게

자연스럽다...그리고 또 하나...은교가 이적요 몸에 헤나를 해줄 때 영화에서는 그냥 어색하기만 한 걸로 나오는데

책에서는 그게 어찌보면 되게 중요한 설정 같은데 전혀 반응없던 몸이 그 때 다시 젊은이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은교의 등장은 이적요의 마음 뿐만 아니라 몸에도 봄을 가져온 것이다...그야말로 회춘...

이 부분은 뭔가 징그러울 수 있어서 뺀 거 같은데...영화에 넣었어야 하지 않았나요? 이 부분은 좀 아쉽구나

 

생각하다보니 이 이야기는 나이차이 나는 연애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나이차이에 대한 한계를 그어놓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게 생각해보면 웃긴거다...A가 맘에 든다

근데 알고보니 난 위아래 5살 주의인데 그가 위 혹은 아래로 7살이네...그럼 그만둘건가?  말도 안되는거다...

나이가 어리면 어떻고 나이가 많으면 어떠하다는 것도 다 편견인거지...그냥 개인차가 있을 뿐...아닌가?

그리고 나이가 차가 많이 나는 경우 자기 아빠 뻘인데...라고 혀를 차지만...2-3살차이면 오빠 뻘인거지...

전자가 이상한거면 후자도 이상한거다...그리고 왜 가족과 연인을 같이 놓고 보나...그게 말이나 되나요... )

뭐지 그럼?

박범신은 갈망에 대한 3번째 책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내밀한 욕망...그 젊고 탐스러운 소녀에 대한 열망은 죽기 직전까지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일까? 죽기 직전 그러니까 욕망할 수도 없고 어찌보면 욕망해서도 안될

그런 때까지도 사그라들지 않는 목적도 없어 보이는 그런 욕망을 보여주려고 이런 저런 설정을 한 것 같다...

 

이적요를 향한 서지우의 동경? 애증? 하여튼 그것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볼만한듯..

이적요는 끝까지 서지우를 무시하였지만 어쩌면 서지우는 이적요의 생각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적요의 나이듦을 도드라지게 하려고 등장시킨 이유도 있겠지만 또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도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네...ㅡㅡ;

 

어쨌든

이 책 좋다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영화를 봤더라도 꼭

 

 

 

 

 

 

 

 

 

 

우리 사이엔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당신들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서지우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나온 쌍커풀의 운명을 따라 살았다고 느낀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반역에 대해 알지 못했다

평생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같은 존재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칼 크롤크나 자크 오디베르티를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시의 독자성에 대해서도

그러므로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으며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참 좋은 가을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동반해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고 한다는 것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천박한 자신의 욕망을 갖은 말로 치장해 감추면서 세상에 대고 밤낮없이 두 개의 나팔을 불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네가 소녀의 이미지에서 처녀의 이미지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제 육체의 뜰 안에 비밀의 방을 품고 있는 어떤 처녀를 오직 그리워하면서

그러나 현실 속에선 마지못해 살아왔다는 것을 그 데크 소나무 그늘 안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던 처녀인 너를

들여다볼 때 알았다 그때 당장 그렇게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인식되는 것을 일방적으로 믿는 건 위험한거야

인식된 사물이 때로는 그 사물 자체와 얼마나 다른지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명백한 건 모든 게 그날 네 손등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나는 평생 온갖 명분의 깃발을 치켜들고 살아왔다

그 중에 혁명도 있고 시도 있었지 때로 신성 때로는 불멸이 내가 흔드는 깃발에 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껍데기 다 날려버리고 남는 것 내가 온갖 불온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진실로

그리워한 것은 처녀의 숨결이었다는 것이다

네 숨결에 비하면 내가 내걸었던 명분의 기치는 모두

마지못한

것에 불과했다

 

잠든 너를 들여다보는 순간에도 내게 허용된 얼마남지 않은 시간이 샤샥샤샥 바람보다 빨리 흘러가는 소리가

환히 들렸다

폭풍 같은 슬픔이 나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서지우가 칠 듯 손을 들었고 은교가 내 등뒤로 숨는 시늉을 했다

단순히 보면 좋은 풍경이었다

나는 허헛 웃었다

이런 정경은 평생 처음이었다

내게는 사랑의 추억이 거의 없었고 가정을 이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죽음은 삶의 한 가지 에피소드처럼

끝내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갔다

라고 톨스토이는 썼다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 사실이다

 

나는 우단으로 만든 토끼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애가 내 주머니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죽음은 더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소주병을 어금니로 따서 목을 적셨다

그애가 준 토끼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오래오래 그것을 보았다

환한 기쁨과 어둑신한 슬픔이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다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한 말이다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

내가 은교의 손을 처음으로 쥐었을 때가 바로 그럴 때이다

 

손에 대해 느끼는 그런 감각의 차이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

나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참된 연애란 남녀불문하고 영혼으로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은교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실체없는 관념이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은교와 만나는 나의 감각들은 몸서리쳐질 만큼 살아 있었다

뽀뽀도 그냥 하는 세상을 알고는 있었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다른 세계였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연애를 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잠언은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늙은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은 아니다

 

그래 감자탕이면 어떠랴 은교와 함께 있는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름다움은 각자의 심상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기호에 따른 고혹이거나 감동이다

나는 고요히 그애의 머리칼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애를 오로지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은 관능조차 이길 수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나의 사랑으로 관능과 욕망을 자유롭게

공깃돌처럼

갖고 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의 욕망은 자연스럽고

늙었으니 나의 욕망은 반자연적인 범죄라고 말하고 싶을 터이다

 

밀란 쿤데라도

불멸은 소송이다 라고 말했다

 

이적요 기념과도 문학상도 만들 터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심정은 한 마디로 엿 먹어라 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나의 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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