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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일상이 슬로우 - 신은혜

by librovely 2022. 10. 28.

일상이 슬로우                                신은혜                                    2021                       책 읽는 고양이

 

책 표지도 가벼워 보이고 제목도 그렇고 책의 물리적인 무게도 ㅋㅋ 가벼웠다 그래서 그냥 심심할 때 잡지보듯

읽을 요량으로 빌렸는데 재미있었고 통찰력 있는 내용도 많았고 카피라이터라 그런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둘 다인지 하여튼 글이 참 좋다 내용도 좋고 문장도 좋다 

 

저자는 삶에 여유가 없었나보다...그럴만하다 직업의 특성이...아이디어를 계속 내야하고 채택이 되거나 안 되거나

하는 걸 반복해야 하니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 그리고 자존감 지켜 내기도 쉽지 않았을...그저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나는 감각있게 썼다고 생각해도 그걸 받아들일 광고 소비자들의 취향을 제대로 만족시켰을지는

모르는 일이고...쉽지 않... 창작하며 하는 일은 재미있어 보이긴 했는데 그만큼 스트레스가 ....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 계속 말하는 게 여유를 갖자...는 것....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새로울 게 없는 일상의 반복이라서 그럴거라는 말

끄덕끄덕... 새로운 것들로 일상을 채워 넣어서 아깝지 않게 알차게 하루 하루 보내야지....라는 생각을 했고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책도 좀 읽다가 출근하는 그런 여유도 챙기고 싶다는 지키지 못할 생각도 해봄

 

술술 읽히면서 내용도 의미 있는 좋은 책이다

 

 

 

 

 

식물을 살피고 어제 읽다 만 소설을 읽는다 요즘은 대체로 글을 쓰고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면 이불을 개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저녁에 돌아온 내가 기분 좋게 쉴 수 있도록 집 전체를 가볍게 정돈한다 

마지막으로 씻고 나갈 채비를 한다

조금 일찍 시작되는 나의 아침은 이제 출근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어제와 오늘 내일로 이뤄진 인생 이미 34년을 사용했지만 아직도 많는 날들이 남아있는 인생

그 많은 날들 중 딱 1년을 떼어내 오롯이 나만을 위해 써도 괜찮지 않을까

막연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퇴사하고 이틀 뒤 나는 하와이로 떠났다

 

모든 여행은 시한부다 몇 시 몇 분까지 정확히 찍힌 리턴 티켓은 우리에게 주어진 몇 박 며칠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해준다 평상시라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도 주말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소중히 사용되고 주로 정신차리는 데 흘려보내던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삶의 마지막을 아는 사람처럼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매일 밤 일상으로 복귀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속으로 세어보며 내일은

더 잘 보내리라 괜히 다짐도 한다 시한부 여행은 지금에 집중하도록 만들고 새로운 용기를 준다

 

책을 읽는 건지 아이디어 단서를 찾는 건지 나중엔 활자만 봐도 진저리 나고 스트레스가 돼서 아예

책을 덮어버렸다 그러다 친구의 추천으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듣게 되었다

소개된 <7년의 밤>과 <고래>를 출근길에 듣다가 직접 읽어보고 싶어서 퇴근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고래> 첫 장을 펼쳤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밤 11시까지만 읽고 자야지

했던 결심은 단숨에 무너졌다 한 장만 더 읽자 한 장만 더 읽자 하다가 밤을 꼴딱 새웠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책을 읽은 게

책이 삶에 다시 들어오자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인데도 왠지 모르게 들떴다

 

살면서 책 읽기가 성적을 올리는 데 도움을 줬다든가 좋은 카피를 쓸 수 있게 즉각적인 영감을 줬다든가

하는 혜택 따윈 없었다 하지만 나만의 감수성 생각하는 스타일 삶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은 즉효약보다는 보약과 비슷해서 인생 어딘가에서 책의 부분 부분

들이 조용히 힘을 내고 있달까 

 

사람은 나이 들수록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나이가 들면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과 같은 소소한 경험에서 얻은

행복이 해외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험에서 얻는 행복 만큼 크다고

그러고 보면 나이 드는 것도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꽤나 멋진 일이구나 싶어진다

 

집에 가는 빠른 길을 두고 풍경이 예쁜 길로 돌아서 갑니다

시킨 음식을 바로 먹지 않고 해변으로 들고 가 먹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감상합니다

느리고 알차게 살아갑니다

 

오후 2시 반에 끝나는 고등학교라니

그럼 도대체 너희는 언제 놀아 라고 물어오는 엘리자베스의 반응

여태 그런 질문은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공부는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고 놂은 인생을 망치는 숙적이었으니까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시각 차가 신선했다

 

왜 지금의 1년은 어릴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질까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외로울 땐 외로워하기 모를 땐 모른다 하기 싫을 땐 싫은 티 내기 척 하지 않고 살아가기

 

돈이라 부를 만한 약간의 돈이 모이자마자 바로 독립했다

이곳에 있는 물건은 하나하나 내 취향의 집합소가 되었다

거기에 생활 습관과 세월이 더해지자 어느새 나의 집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되었다

집에 놀러 온 사람마다 말하곤 했다

네 집은 뭔가 너를 닮았어

 

한국에서 데려온 평소의 나는 잠시 숙소에 두고 새로운 나를 외출시켜보는 거다

한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그곳에서

 

간지럼 타지 않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외로움을 전혀 타지 않는 나는 어떻게 혼자 있는데

외롭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약속이 깨지면 서운한 마음보다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안도가 먼저 든다

퇴근하고 친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겁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이 넘으면 힘들어진다

함께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70:30으로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하와이에 온 지 세 달 정도 되었을 때 극심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아주 당혹스러운 감정이었다

아 지금껏 나는 내 인생에서 완벽하게 혼자였던 적이 없었구나

퇴근 이후의 삶은 혼자였지만 퇴근 이전의 삶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였다

과거의 여행에서도 도착은 언제나 혼자 했지만 여행길은 우연히 만나 금세 가까워진 사람들과 함께였다

 

나의 삶이 혼자서 순조롭게 굴러갈 수 있었던 건 매일 만나고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그냥 전화를 걸면

그냥 전화를 받고 그냥 만나자 하면 그냥 만나는 이들이 삶의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지만 아주 잘 살았다

책을 보면서 친구를 기다리고 좋아하는 가수의 CD가 발매되는 날짜에 맞춰 레코드 가게에 가고

만화책 신간이 나오면 서로 돌려보고 갑자기 궁금한 게 생기면 친구에게 전화하고 잠자기 전 라디오를

듣고 다양한 것들이 시간의 공백을 채워주었다

 

하기 싫은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싫어하는 것을 돌려 말하지 않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내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은 쉽게 쟁취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무엇보다

소중했다 하지만 인생에는 억지로 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것들이 존재한다

걱정은 잠시 뒤로하고 현재에 풍덩 빠지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다 가끔은

 

공자의 제자 유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공자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야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란다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것이 시인의 재능이라고 작가 앙드레 지드는 말했다

별거 아닌 것에 감탄하고 당연한 것에 놀라는 재능

그러고 보면 여행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시인을 깨우러 가는 여정 같다

시장도 여행지에선 미술관 못지않은 존재가 된다

가판대에 놓인 생선 채소 과일은 사진을 찍게 만드는 작품이 되고 어디 그뿐인가 매일 뜨고 지는 당연한

태양에도 당연한 구름에도 당연한 노을에도 하다 못해 쓰레기에도 감탄해 마지 않게 된다

습관처럼 버려주세요 하던 영수증도 유럽에선 고이 챙겨 수첩 사이에 꽂아두고 티켓 버스표 신문지

돌멩이 같은 각종 쓰레기를 캐리어에 소중히 담아온다 

익숙한 생활로 인해 마모되고 둔탁해진 시각과 청각 촉각 등 온갖 감각이 날카롭게 되살아나면서 

새삼스럽지 않은 것들이 새삼스러워진다

 

나는 <우연한 산보>의 주인공처럼 동네에서 자주 태평한 미아가 되곤 한다

그의 표현을 빌려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

 

오랜만에 일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일하는 과정에서 생성될 감정들이 두려웠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알랭 드 보통의 글귀가 떠오른다

일하기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일이라는 건 하루 중 3분의 1을 차지하는 만큼 중요하지만

나머지 3분의 2를 좌우할 만큼은 아니다 

 

먼 옛날 이십여만 명의 선조들이 돌을 나르고 쌓으며 98일만에 축조한 성벽이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한양도성을 한 바퀴 빙 돌며 안팎 풍경을

구경하는 일을 멋진 놀이라고 기록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기서는 걷는 행위가 놀이가 된다

 

물 맑고 산 맑고 사람 맑다 하여 삼청동이라 불리는 동네에서 맑은 기운을 가지고 서쪽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