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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

by librovely 200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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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진중권                 2009              휴머니스트



예약판매 기간을 놓쳐버려서 사인본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인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당일배송이라는 글자를 보고 바로 주문을 했다...
10월 6일 오전 9시 40분 난 분명 10시 이전에 주문했고 당일배송이라는 글자도 확인했다



그런데 6일에 책이 안왔고 왜 당일배송이 안되는 것이냐고 고객센터에 글을 남겼지만 아무 답변이 없었고
7일에도 안왔고 8일에도 안왔고...8일에야 배송문의에 대한 답변을 받았는데 안내 없이 배송일을 훌쩍 넘겨버려서
짜증이 났었는데 답변의 내용 중 '저자 사인본 제작이 늦어져서' 라는 구절을 본 순간 얼굴에 미소가~~
9일에 정말로 사인본이 배송되었다...어쩌면 이렇게 사인도 멋진걸까...누군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진중권이 너에게는 종교야...'   진중권 블로그에서 본 댓글도 떠오른다...
'중권이 형이 그렇다면 그런거다'   아~ 웃기지만 나에게는 적용 가능한 사실...ㅡㅡ;;



진중권의 책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사회관련 책과 미학 책...
진중권은 미학자이지만 난 그가 쓴 사회에 대한 책이 재밌었다...쉽게 읽히고 웃기고 알게된 바도 많고...
물론 미학 책도 좋았다...미학 오디세이의 1권과 미디어아트...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솔직히 미디어아트가
가장 어려웠고 미학 오디세이 1권은 약간 어려웠고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재밌고 쉽게 읽혔다....
물론 내가 어느정도 이해를 했느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하여튼... 그럼 이 책은??



최고다....ㅡㅡ;;
진빠라서 별 신빙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책은 가히 환상적이다...
누군가가 내 머리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써 준 책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소 원하던 내용이 가득한 책...
진중권이 쓴 책이 아니었더라도 반응은 같았을 것이다...이 작가 누구야?? 하며 좋아서 정신못차렸을듯...
아껴 읽으려고 굳게 마음을 먹었으나 낼름 다 읽어버렸다....내용이 너무 재미있고 새롭고 그러면서도 쉽게 읽힌다
아쉬운 건...왜 제목이 교수대 위의 까치....교수대 위의 까치1 이어야 마땅하다...고작? 한 권으로 끝낼 것일까....
다 읽고 나서 더...없나??? 더 읽고 싶다...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무한반복...



진중권은 이 책을 읽고 독자들도 그림을 대할 때 기존의 주어진 해석에 머리를 내주지 말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진중권이 이 책을 쓸 때 필요한 배경지식들을 거의 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었으니
우리들..그러니까 독자들도 충분히 가능한거라고...음...역시 가진자들은 빈곤한자의 슬픔을 이해하기 힘든 법이다
이쯤에서 잡설은 그만두고....(과연..?)



이 책에는 1500년대 전후의 그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시기에도 이렇게 흥미로운 그림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일단 신기했다...(이 지경인데 무슨 검색을 할까....)
만약 이런 그림들을 미술관에서 보았다고 해도 난 그런 그림들의 숨은 뜻을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현대미술이 아닌 이상 모두 숨겨진 뜻 같은 것은 없고 그냥 현실이나 성경 혹은 신화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그린 것 뿐이라고 생각했을테니까... 상징적인 것이 있어도 그냥 뻔한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진중권에게 영적울림에 가까운 푼크툼의 효과를 준 작품은 책 제목이기도 한 '교수대 위의 까치'라고 한다
그래서 그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는데 난 바보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교수대 위에서 유유자적하며 바라보는
까치의 모습이 진중권의 모습과 통하는 것 같아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어보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까치는 네덜란드에서 말 많은 경거망동한 그런 새로 통한다고 한다...그 부분을 읽고는 음...갑자기 한 분이
떠올랐다...이 책을 집필하기 전...진중권을 너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괴롭히시던 그 분...헛소리를 퍼트리시던
뭔가 안타까운 그 분... 103쪽을 읽으면서 아...이 부분을 꼭 그 분이 읽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ㅡㅡ;



다시 영혼의 울림....푼크툼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어떤 그림이 그랬을까?
사실 그림을 많이 본 것도 아니고 보는 눈도 없기에... 떠올릴 그림이 없다...슬프지만 사실....
그래서 이 책에 나와 있는 12작품 중에서 골라보자면 가장 맘에 들어온 그림은 고야의 <개>
불쌍한 눈망울로 얼굴만 내민 채 위를 올려다보는 개에게서 고야가 아닌 나를 본다...ㅡㅡ;;
왜 사는지 알 수 없지만 나이는 먹어가고 죽음은 점점 다가오고...물론 정확히 하자면 개의 다리정도만 모래에
파묻혀야 내 상황과 비슷할 것 같다...아직 인생의 반은 못 살았으니까...하지만 그 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래는 점점 차오르고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는 결국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것...



조르조네의 <폭풍우>도 마음에 와 닿는다
평온한 전경과 폭풍우가 시작될 듯 보이는 후경
난 이 전후를 수시로 왔다갔다 하니까...마냥 살만하다가도 갑자기 찾아오곤 하는 지독한 허무감...
현실만 생각하며 살 때는 그냥 적당히 조용히 사는 것 같다가도 미래나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요동친다...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은 대부분 맘에 들었다...왜? 
그가 나를 그려줬기때문에...ㅡㅡ;;
<네덜란드 속담>에는 벽에 머리를 처박고 손에 칼은 쥔 내가 멋진 뒤태를 자랑하며 서 있고 <소경의 인도>에는
날 닮은 인간들이 줄줄이 걸어가고 있으며 <염세가>에도 엉거주춤한 자세의 내가 등장한다



보슈의 그림도 대부분 맘에 든다.... 이유는 위와 비슷하다....
<야바위꾼>의 야바위꾼에게 홀린 사람의 멍청한 표정은 '프로파간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프로파간다'가 나와서 말인데...나의 찬란한 무식함을 자랑하자면...난 프로파가 지명인줄 알았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은 여기저기 많은 책에 나오는데...왜 선전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프로파간다라고 하는지...
라고 말하는 나 조차도 <야바위꾼>을 보니 '선전'이 떠올랐다가 아니라 '프로파간다'가 떠올랐다고 하였구나...
왜? 왜냐면...좀 있어 보이니까...영어가...근데 이것도 일종의 프로파간다 산물이 아닌지...영어가 유식함의 표상?




영혼의 울림...푼크툼 효과는 사실 여러 분야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책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영화가 될 수도 있고...또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책은?  내 경우에는 알베르 카뮈와 카프카... 몇 권 안 읽었지만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 작가들...
영화는? 브이포벤데타 렛미인 오만과편견  별로 본 영화가 없어서 아직은....
사람은? 있긴 하지만 안 쓰는 게 보기 좋을듯...ㅡㅡ;;



진중권은 그림을 감상하는 네 가지 수준을 이야기한다
정서적 감동
지각적 쾌감
지성적 자극
영성의 울림
마지막이 푼크툼 효과라는 것이겠지?  진중권은 지적 측면에 끌린다고 한다...나랑 똑같구나....
진중권의 비행기 취향은 안젤리나 졸리와 일치하고 나의 그림 감상 취향은 진중권과 일치한다
이게 대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진중권에게 안젤리나 졸리는 나에게는 진중권이라는 의미...
누가 보면 헛소리처럼 보이겠지만 헛소리 맞다...이게 대체 뭐지...그만...조금만 정줄을 놓으면 헛소리가 줄줄...



진중권이 책의 서두에서 강조하듯 진중권이 좋아하는 12개의 작품에 대한 진중권의 개인적 감상이 들어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감상과 다양한 해석들도 곁들여져 있다...그래서 더욱 재미있다...이 책을 통해 진중권은 우리가
모두 그림을 대할 때 주어진 해석에 의존하지 말고 가능하면 자기만의 감상을 하길 권한다...그게 얼마나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건 확신한다....
책을 덮고 나니 갑자기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다...그리고 별 관심 없던 수백년 전의 그림들에도 관심이 생긴다...



앞부분에는 성경의 내용과 관련된 그림이 등장하는 데...좀 무서웠다...뭐가?
음...성경의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데...음...예상은 했으나 진중권이 성경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니 혼란이... 교회에서는 성경은 진리다...이러이러한 것이 진리인 이유는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어서다
라고 하는데 그 성경도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이고 실수도 있고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게..
진중권이 그렇게 이야기해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그게 역사적으로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라는 언급 자체가 혼란을 가져온다...계시록도 과거의 일을 써 놓은거다 그 당시의 현실을 은유한 것이다..등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는 것도....으으음...괜찮다...어쨌든 신이 존재하고 예수님이 존재했다는 것을 믿으면 되는거지
뭐...라며 좀 가라앉히고 넘어가자...



진중권은 12개의 장 중에서 굼프의 자화상과 기스브레히츠의 정물화를 다룬 장의 서술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나는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와 역시 기스브레히츠의 정물화 그리고 고야의 개가 가장 맘에
들었다  조르조네의 해석의 바벨탑도 역시 매우 재밌게 읽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진중권 특유의 논리정연 말끔한 문체도 뇌를 즐겁게 만들어준다...



<시지프의 신화>, <공산당 선언>에 이어 올해 읽은 최고의 책 베스트 뜨뤼~를 장식한 <교수대 위의 까치>
이런 책은 닥초사 닥치고초판사수
무조건 사서 읽어야할 책
그림에 관심이 없거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 책을 읽으면 관심도 생기고 뭔가 약간은 알 것 같아지기 때문에...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우리가 처한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정상적 상태



부조리야말로 삶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 상태



예술작품에 건조하게 매료될 수도 있다
정서적 감동
지각적 쾌감
지성적 자극
영성의 울림



에니그마
어둡게 말하기



작품은 에니그마로 생성한 암호문이 아니라 수많은 암호문을 생성해내는 에니그마에 가깝다
새로운 물음들을 생성



작품을 스스로 읽는다는 것은 작품을 보며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이다
작품은 끝없는 물음과 답변을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생물
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공동 창작의 산물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
푼크툼



해석에 반대한다  수잔손탁
하나의 해석을 특권화하는 사고방식을 의미



작품과 관객의 관계가 고독하고 개별적이어야 한다



초현실주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적 장면을 해체시켜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로써 평범한 것 속에 감추어진
비범한 것을 보게 해준다



작가가 의도했던 연출속으로 들어가 그 분위기를 몸으로 체험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회화를 가리켜 말 없는 시라고 불렀다



기독교
다양한 종파의 공통점은
지배체제 즉 현존하는 권력을 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게 되나...ㅎㅎ ㅡㅡ;;)



움베르트 에코
책은 언제나 다른 책을 언급할 뿐이고 이야기는 언제나 이미 말 한 이야기를 말할 뿐이다



데리다
텍스트 너머는 없다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한다 하나 모든 예언은 실은 과거를 말할 뿐이다
예언이란 이렇게 나중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정당화되는 어떤 것이다



에스라 선지자는 그 모든 것이 여호와가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에게 명령을 내린 결과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 페르시아 인들이 그 얘기를 들었다면 실소를 머금지 않았을까?
(항상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문제...ㅜㅜ)



히에로니무스 보슈가 살던 시기 물 튤립은 광기 어리석음
보슈가 평소 비판하곤 했던 교만 허영 사치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한 것은 찬란한 이성만은 아니었다 어두운 광기도 있었다
무엇이 광기이고 무엇이 이성인가



입이 가벼운 자들에게 브뤼헐이 보내는 고약한 블랙 유머



교수대 아래서 춤을 추거나 교수대에 똥을 눈다는 속담
더 이상 권력의 무서움을 모르는 철없음이 아니라 죽음과 권력을 조롱하는 민중의 용기를 상징
우리는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을 통해 권력과 죽음을 비웃는 민중의 예를 알고 있다 (나는'우리'가 아니구나...)
처형대 주위에 몰려드는 것은...이제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막판의 사형수가 재판관을 법을 권력을 종교를
저주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무서운 권력을 보여주어야 할 이러한 처형의 카니발과 같은 축제의 양상이
있는데 여기서 각자의 역할은 역전되어 권력자가 농락당하고 죄인은 영웅시된다




대중을 바라보는 브뤼헐의 시선은 때로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인간 혐오에 가까울 정도다



최고의 풍자는 역시 자기 풍자이다



브뤼헐이 보는 세계는 온통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 불합리함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한다



교수대는 3차원의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형태
그 자체가 부조리한 형상



어른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묘사한다   아동화의 특성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지다



예술에는 근원적 시작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민속학 박물관이나 아이들의 방에서 볼 수 있다 - 파울클레



클라이브 벨  아동화의 특성
환영주의적 재현이 없는 것    기술을 과시하지 않는 것      숭고하게 인상적인 형태



회화의 정체성
자화상에서 예술가 주체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이젤 위에 덩그마니 놓인 캔버스 위의 재현뿐
회화로 자연이 아니라 회화 자테를 탐구할 때 자화상은 메타 회화가 된다
회화를 회화로 탐구하는 재귀성



미셸 푸코
표상이 근거하고 있는 그 무엇은 필연적 소멸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실은 가상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가상은 뚜렷하게 현실성을 띤다
현실의 화가 -> 거울에 비친 화가-> 캔버스 위의 초상
모방의 모방
시뮬라르크


가상만 남기고 현실은 사라지게 하는 것
바로크 특유의 세계 감정
인생이 연극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대사
세계가 헛된 가상에 불과하다
바니타스



자기상 지각 현상
직접 자기 눈으로 자기의 바깥에서 자기를 보는 착란증



트롱프뢰유 회화는 경계를 넘어 아예 사물로 착각되기를 원한다
정물이라는 장르는 실은 미술사의 변두리였다
정물이 주도적 역할을 한 적도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자본주의와 시민사회 발전이 앞섰던 네덜란드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을 것
소유한 사물을 그림으로 재차 소유하고 그로써 그 사물에 대한 소유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에스토니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
모든 문화적 현상 속에는 낱말과 사물의 대립이 존재하는 바 정물화는 이 두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정물화의 두 방향
그림이 낱말이 되는 길 : 바니타스 (사물은 그 사물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삶의 무상함을 의미하는 어휘)
그림이 사물을 지향하는 길 : 트롱프뢰유 정물(진짜 사물로 착각되거나 아예 그것을 대체하려 한다)



한쪽 귀퉁이를 슬쩍 나무틀에서 떨어뜨릴 때 3차원의 공간의 환영은 졸지에 물감이 발라진 화폭으로 돌아간다



해석은 역사화의 두 축인 성경과 신화를 오간다


월터 페이터
조르조네 화파에 대한 글에서...
단순한 제재를 억누르거나 모호하게 함으로써 오성이 쉽게 추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의미가 다가오게 하는



과거에 풍경은 역사화 속에 묘사되는 사건에 공간을 제공해주는 배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1500년을 전후하여 풍경은 서서히 자립적 장르로 독립하기 시작한다
과거에 인간은 신을 통해서 자연을 지배
하지만 신이 떠난 세상에서 인간은 이제 자연을 직접 대면



반제재
비제재



조르조네의 매력은 의미를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 미학
고전주의는 명료함을 추구하나 낭만주의는 불명료함을 선호
고전주의는 이성을 중시하나 낭만주의는 상상력을 선호
조르조네는 의미를 흐림으로써 해석을 보는 이의 상상에 맡겨버린다


칸트는 미적 체험을 오성과 상상력의 유희로 규정
페이터는 그것을 지적 상상력이라 부른다
현대 예술은 의도적으로 다의미를 추구한다



송대방의 소설 <헤르메스의 기둥>



검은 회화 연작
어두운 색조
세계의 기괴함과 인간의 악마성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그렸다 은둔을 위한 별장의 벽에 그렸으니
고야의 정신세계의 가장 내밀한 표현


프랑스를 사랑했으나 프랑스는 고국 스페인의 침략자
진보를 믿었으나 근대화의 선봉 나폴레옹의 군대가 그의 동포들에게 저지른 짓은 전근대적인 만행
그는 이성을 믿었으나 그가 목격한 것은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들의 변함없는 야수성



고야의 현대성
의미는 매우 애매
누구? 말대로 (누굴까...)
광기를 무릅쓰고 발견한 심오한 인간의 진리
해독할 것도 아니고 성스러운 금단의 재단처럼 경외하거나 숭배할 것도 아니고 그저 끌어안아야 할 어떤 것



비제재라 하여 작품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명확히 규정할 수 없을 뿐이지 외려 그 안에는 더 충부한 의미의 놀이가 있다
그것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관객의 상상력
막연한 상념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
견유주의자
우리는 개를 자처했던 디오게네스가 실은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는 그 어떤 자보다 더 인간적이었음을 안다



저 개의 처지는 모든 희망을 잃고 절대적 고독 속에 살았던 고야의 말년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 수용소 시절
유일하게 그들을 인간으로 대한 것은 날마다 수용소로 찾아온 개
유대인들은 날마다 개와 인사를 나누면서 그 개에게서 인간에게서는 찾아보지 못한 인간성을 확인
어느 날 독일군 병사가 개를 쫓아냈고 레비나스는 말했다  "나치 독일의 마지막 칸트주의자가 사라졌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텅 빈 공간만큼 공허하게 이어지는 알 수 없는 기다림만이 존재 (고도를 기다리며)
20세기 인간의 세계 감정
즉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읽어낼 수도 있다 실제로 고야는 그만큼 현대적이다



고야의 위대함은 외려 수많은 의미를 낳는 그 의미론적 생산성에서 찾아여 할 것이다



열네 점의 검은 회화 전체가 위작일 가능성
그림을 배웠고 아버지의 화법에 정통했던 아들 하비에르
검은 회화가 고야의 것이 아니라면 작품들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검은 회화는 위작과 원작의 시간 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회화는 고야의 것으로 확인된 작품들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독창적이다
검은 회화가 위작이라는 주장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럼 누가?
그 당시에 이런 그림을 그릴 사람이 고야 외에 또 누가 있느냐는 평가
고야의 것이든 아니면 제자의 것이든 그로 인해 작품 자체에 대한 미적 평가가 달라져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검은 회화의 구상이 속물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할 때 깨지는 것은 작품을 감싸는 신비한 분위기다
하지만 아우라가 깨진다고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흐의 작품을 보며 사람들은 즐겨 정신병에 시달리던 가난한 천재의 삶을 떠올리곤 한다
고흐의 작품이 위대한 것이 어디 그가 칼로 제 귀를 잘랐기 때문이겠는가?



고야의 것이 아니라면 가치가 없다는 느낌은 작품은 예술가의 주체성의 표현 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작가를 이해했다고 곧 작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일단 작가의 품을 떠나면 작품은 자립적인 삶을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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