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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by librovely 2013. 11. 10.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열린책들

 

몇 달 전에 반 정도 읽었었다

세밀한 묘사를 통한 인간 심리에 대한 예리한 통찰에 감탄하며 읽었는데 끝까지 못 읽고 반납하고 잊었다가

다시 생각나서 이번에는 쉬지 않고 내리 읽었다 다시 읽어도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비록 번역본을 읽었을 뿐이지만 이디스 워튼의 글은 매우 매력적이라는 느낌

 

이디스 워튼은 뉴욕에서 실제로 상류계층에 속하였고 이 소설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그런지 내용이 아주 자세하며 그 사람들의 (지금과도 별 다를 것이 없던) 허례허식과 속물근성을 잘 드러냈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던 사랑이야기도 들어가 있고...읽는 동안 아처와 올렌스카의 어긋남이 심하게 안타까웠다

 

아처는 세상의 속물적인 것들에서 자신은 벗어나 있기를 바랐고 책도 많이 읽었고 자신의 부인도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그 세계 안의 사람이었을 뿐이고 아내를 고를 때도 지극히

세상의 눈으로 마땅한 여자를 선택했다 그런 그의 눈에 갑자기 들어온 이혼 예정녀 올렌스카...그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한 날 서둘러 약혼 발표를 하고 그 다음에는 결혼도 서두르려고 한다...본인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올렌스카에게

정신없이 마음이 가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와의 결혼은 사람들 눈에 절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것이기에

아니면 그저 마음이 심하게 빠져드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적당히(?) 좋다면 거절당하거나 나중에 헤어지게 되더라고 적당히 가슴 아플 것이고 감당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좋다면 거절당하거나 헤어지게 될 때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질 것이고 아예 시작을 말아야겠다는

방어기제? 물론 소설 안에서는 그저 그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놓고 봤을 때 메이와 약혼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름다운 행동이기에 그랬던 것이고 이성은 그렇다고 하지만 감성은 엉뚱한 곳으로 내달리니 아처는 스스로 피할

길을 찾으려고 결혼을 서두르게 된 것이겠지...그리고 뒤늦게...이게 문제다...항상 뒤늦게...

 

뒤늦게 올렌스카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결혼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결심 비슷한 생각이 들던 그때 하필 결혼

날짜를 당기는 걸 싫어하던 메이가 결혼을 서둘러 하겠다고 하고 그렇게 뭔가 등떠밀리듯이 결혼을 하게 된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처는 이혼을 결심한 올렌스카에게 찾아가 그녀가 이혼하지 않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말에는 움직이지 않았던 올렌스카는 아처의 설득에는 그냥 넘어간다...

 

올렌스카는 사랑없는 결혼 따위는 그만두려 하지만 아처와 메이에게 자신의 이혼이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이혼은 하지 않기로 하는 것...올렌스카의 남편은 이혼을 원래 원치 않았고...

아처는 이혼을 막으려 할 때 자신의 올렌스카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눌러놓은 때였고 또 이혼을 해서  재정적

어려움에 처할 그녀를 걱정했던 것도 같다...어쨌거나 서로를 위한 마음에 한 일들이 둘의 관계를 더 망쳐놓게 된다

 

아처는 결혼을 했고 순수한 처녀였던 메이....와 그나마 맞다고 여겼던 여행에 대한 취향마저 전혀 맞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예상대로 그들의 결혼 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못하다 단지 메이는 그 시대 뉴욕 사람들이 으레

결혼상대로 좋은 여자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그런 메뉴얼대로 부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여자였을 뿐이고 아처가

기대한 결혼 상대는 대화도 통하는 서로 인격이 있는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이 가능한 그런 여자였고...거기에서

비극이 시작된거고...아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올렌스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크게 느끼게 되고 결혼한 상태임에도

올렌스카를 찾아가 만나길 원하고 그 시대 남자들이 보통 그러했듯이 혼외 관계라도 만들어보고 싶어 했다

올렌스카도 처음에는 그냥 이 상태가 최선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곁에 존재할 수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아처의 생각에 좀 흔들리는 것도 같은데 결국 그녀는 파리로 떠나버리게 된다(맞나?)

왜 그랬을까 했는데 그 즈음에 메이가 올렌스카에게 아처에게보다 먼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렸었기에...

그 소식에 올렌스카는 다 접어버리고 홀연히 그의 곁을 떠나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둘은 떨어져서 소식도 잘 모르는 채 30여년을 사는데...

그렇게 몸을 떨어져 있지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지만 이미 서로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았기에 그 이후로 아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사실 둘은 그야말로 정신적인 관계...몸 한 번 섞은 일이 없다

그런 게 사랑은 아닌거다  요즘 읽은 강신주의 다상담이라는 책에서는 사랑과 몸은 뗄레야 뗄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사랑이 모두 같은 빛깔은 아닌거다...하여튼 둘은 각자의 삶을 살고 올렌스카는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나오지 않고 아처는 메이를 보면 숨막혀 하지만 그래도 남편 역할을 무리 없이 감당해나가며 세월을 보내고

그 중간중간 올렌스카의 삶에 대해 홀로 상상해보며 버틸 뿐이었고 메이가 병에 걸려 죽은 후 아처는 아들과

파리에 가고 아들은 올렌스카에게 가보자고 하는데 아처는 그녀 집 근처까지 같이 가지만 만나러 가는 것은 포기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앞부분에서는 그 시대의 속물근성...따위에 집중하게 되고 중간부터는 올렌스카와 아처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둘은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결정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 가장 나쁜 결정을

한 것 같다... 세상의 기준 따위는 중요하지 않던 올렌스카는 아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의 기준을 위해 본인의 삶도 희생한다  아처는 올렌스카를 위한 것이 이혼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설득해 놓고는 그 것에 발목이 잡혀 올렌스카를 붙잡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자신이 그렇게 거부하고

싶어하던 그런 관습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평생을 얽매이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메이에게 잠깐 슬픔을 줄 수 있었겠지만 올렌스카와 그냥 만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결국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아처는 메이에게 엄청난 상처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가 올렌스카를 포기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런 상태로 껍데기 남편과 사랑없이 살다 죽었다

올렌스카는 올렌스카 나름대로 아처를 포기하였으나 마음속에 지닌 채 평생 그리움으로 파리에서 살았을 것이고

아처는 꿈꾸던 것과 정반대인 결혼생활을 의무감으로 코스프레하며 살았고 마음 속에서 올렌스카를 그리워하였다

 

고전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 안 된 책이지만...하여튼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은 혹은 사람은 그렇게 빠르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대의 문제들이 지금의 문제인거다....정도 차이일 뿐이지...아니 정도에 차이가 있긴 한가

요즘에도 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 자신이 열정을 품은 그 대상과 하려기 보다는 세상에서 준 이런 저런 기준을 가지고

적당해 보이는 사람과 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세상의 관습에 어긋나지 않는 그런 사람을 선택하려고 노력하고...

그런 기준에 맞는 사람을 만났을수록 자신의 결혼이 완벽하리라 예상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그게 정말이면 좋지만..

결국 그런 기준들에 적합한 사람과 결혼을 했을 때 그 결혼 생활은 예상과는 많이 다를 수 있고 그렇게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또 관습들 때문에 섣불리 이혼을 할 수 없고 애가 생기니 더 불가능하고 그래서 그렇게 버텨내며 하루 하루 보낸다

의무감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상대가 이혼한 경험이 있건 돈이 없건 뭔가 평범하지 못한 취향을 지녔건 내 옆에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건간에

그런 건 따지지 말고 오로지 사람 하나만 보고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겠지

인간이 만들어 놓았을 뿐인 각종 관습 따위는 걷어 차 버리고...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 따위는 차치하고

마음가는대로 살자? 그런 것일까?

 

이디스 워튼은 실제로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점도 맞지 않아 보이는 오빠 친구와 결혼을 하지만 28년만에 결국 이혼

이디스 워튼은 10살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맹렬히 독서만 해서 부모와 불화가 있었다는 설명도 있던데...귀엽다...

역시 이 정도의 멋진 소설을 쓰려면 유별난 면이 있었어야 했구나...

 

영화도 보려고 DVD를 몇 달 전에 사 놓았는데 드디어 책을 다 읽었으니 영화도 봐야겠다

예전에 스크린이라는 잡지에 이 영화가 개봉할 즈음 실렸던 사진들이 기억난다

너무 하얗고 예쁘기만 했던 손에 핏줄이 선 게 다 투명하게 비치던 메이역의 위노나 라이더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앙큼한 표정을 보이던 미셸 파이퍼...둘은 예뻐 보였는데 다니엘데이루이스는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뭔가

조합이 아쉬워...했던 기억이....

 

메이...인형같은 메이...정해진 예법에 맞는 말만 주절주절 읊을 수 있는 예쁜 인형 메이...

올렌스카...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을 좋아하고 남의 시선보다는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려는 올렌스카...

어쩌면 올렌스카와 사랑에 빠진 경우 그 끝이 쉽게 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메이처럼 죽을 때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인간의 사랑 감정이라는 게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나...

물론 그래도 아쉬울 건 없을지도...아처는 메이와는 그 사랑 감정이라는 게 아예 없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요즘 남자들은 아직도 메이같은 여자를 신붓감으로 구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생각도 없고 개성도 없지만 외모는 예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에도 괜찮고 순종적이라서 평생 내 곁을

떠나지 않을...내가 딴 짓을 해도 모른척 해줄 수 있는 그런 여자

그럼 여자들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지...아처처럼 능력되고 책임감 내지는 의무감이 있는 남자를 원하겠지...모든 건 함께 가는 거지...

 

관습....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인 것 같다...

누구보다도 관습에 얽매인...(그래서 지금 내 상황이 버티기 많이 힘든? ㅎㅎ) 나에게 특별히 의미있는 소설

그리고 다 필요없고 일단 이 소설은 재미있다

(내용도 좋고 문체도....E.M. 포스터의 전망좋은 방처럼 뭔가 묘사나 표현이 상당히 예리하다)

 

 

 

 

 

 

 

 

뉴욕같은 대도시에서 오페라 극장에 일찍 가는 것은 세련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어떤 것이 세련되고 어떤 것이 세련되지 않은지 하는 것은 뉴랜드 아처가 사는 뉴욕에서는 수천 년 선조들의 운명을

지배한 불가사의한 토템 공포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가 늦은 두 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시가를 태우며 시간을 뭉갠 것은 그가 진정한 예술 애호가라서

그 즐거움을 직접 맛보는 것보다 그 즐거움을 생각하는 일이 더 은근한 만족을 주었기 떄문이다

 

뉴욕은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그 옛날부터 크게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먹는 것과 입는 것, 돈에 관심을 기울이는 밍곳가, 맨슨가 계열이고

또 한쪽은 여행과 원예, 좋은 소설에 몰두하며 조야한 형태의 쾌락을 경시하는 아처-뉴랜드-밴 더 루이드 일족이었다

 

품위있는 남자로서 그는 과거를 감추는 것이 의무고 결혼할 만한 처녀로서 그녀는 감출 과거가 없는 것이 의무인데

만약 어떤 미묘한 이유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싫증이 나고 오해와 짜증이 오가면 어떻게 될까

친구들의 (겉으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살펴보면 그가 메이 웰랜드와 이루려고 하는 열정적이고도 다정한 동반자

관계에 미약하게라도 호응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관계를 실현하려면 그녀에게 경험과 융통성과 판단의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받은 교육은 그런 것들을 세심하게 배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혼 또한 주변 대부

분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일방의 무지와 일방의 위선으로 유지되는 무미건조한 물질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결합이 될 거

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 사이에 그가 램프 불빛 아래 본 것은 그가 아는 어떤 방과도 다른 퇴락하고 그늘진 매력이었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얼마간의 소유물(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난파의 잔해)을 가지고 왔다는 걸 알았고

그것은 바로 이 검은 목재로 만든 작고 가녀린 탁자들과 벽난로 선반에 놓인 섬세한 그리스 청동 조각상

그리고 색 바랜 벽지에 못으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 이탈리아 분위기의 그림 두 점을 걸어 놓은 붉은 다마스크 천이

대표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방의 그림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부르고 그 사실을 잊었다는 건 이상했지만 아처는 모욕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방의 분위기는 그가 들어가 본 어느 방과도 크게 달라서 자의식은 모험식 속에 자취를 감췄다

 

혼자 있는 게 좋다고요?

-네 친구들이 있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요

 

전통적으로 처녀는 그렇게 질문하게 되어 있었고 그는 그런 일을 유난히 유치하게 여기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저 배운 것을 반복해 말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물두 살 생일이 멀지 않았ㄷ

그는 양갓집 여자들은 몇 살이 되어야 자기 말을 하게 될까 의문이 들었다

 

나는 당신 뜻대로 했어요 당신 조언대로요

그래요 당신이 옳았어요 하지만 인생은 때로 어려워요 혼란스럽고

그리고 정말로 당신이 옳았다고 느낀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고맙다고도요

그녀는 말을 맺고 얼른 눈에 오페라글라스를 갖다 댔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 있는데 우울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금방 가야 돼요

-알아요 하지만 나는 앞일은 생각하지 않아요 기쁠 때는 그 순간만 생각해요

 

당신이 무얼 하며 지내는지 이야기해 줘

그녀에게 익숙하고 하찮은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있나요?

다른 사람? 당신하고 나 사이에?

우리 솔직히 말해요 뉴랜드 당신이 전과 다르게 느껴져요 특히 약혼을 발표한 뒤로요

 

실수란 누구나 하는거지 하지만 만약 내가 당신이 말하는 그런 실수를 했다면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자고 할 것 같아?

네 당신은 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려고 할지도 몰라요 한 가지 방법이니까요

 

메이의 짐작은 옳았습니다 다른 여자가 있어요 하지만 메이가 생각한 사람은 아닙니다

-나한테서 사랑을 구하지 말아요 그랬던 사람이 너무 많아요

아처도 낯빛이 바뀌어서 일어났다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비난이었다

나는 당신한테 사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하지만 상황이 허락했다면 내가 결혼했을 사람은 당신입니다

-상황이 허락했다면이라고요?

-하지만 상황이 불가능하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이혼을 포기하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게 당신 때문이란 걸 나는 전혀 숨기지 않았는데요!

맙소사 그 때 내 생각은...그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 편지 내용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전혀요 내가 두려워한 건 우리 가족에 오명과 추문이 돌아오는 거였어요

-당신하고 메이한테요

맙소사 그는 다시 신음하듯 말하고 고개를 숙여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뒤의 침묵은 최종적이거 결정적인 무게로 두 사람을 짓눌렀다

적어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가 입을 열었다

 

나의 신부

아처가 말했다 그는 갑자기 암흑의 심연이 그의 앞에 입을 벌리고 자신이 그리로 떨어져 내리는 걸 느꼈다

아래도 더 아래로

 

그녀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여행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여행이란 드레스 주문이 끝나면 그저 산책과 승마와 수영 그리고 잔디 테니스라는 흥미로운 새 경기를

좀 더 많이 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었고 마침내 런던에 이르자 그녀는 얼른 배에 타고 싶다는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아내를 해방시키려고 하는 일은 무용한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메이가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부분이 그가 가장 날카롭게 유지하고자 하는 바로 그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마담 올렌스카를 다시 보고 싶은 건지 어쩐지는 그도 잘 몰랐다

하지만 만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에서 그녀를 본 뒤 그는 그녀가 사는 집을 보고 그가 정자에서 본 그녀의 형상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좇아 보고 싶다는 비이성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그 소망은 밤낮없이 그를 사로잡았다

끈질기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갈망이었다 그 갈망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어디로 이어딜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담 올렌스카에게 말을 한다든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는 어떤 소망도 의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그녀가 걸어간 땅과 그걸 감싼 하늘과 바다의 모습을 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이 지금보다는 절 공허해질 것 같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설득하다가 갑자기 소리치듯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다하지 않았나요?

-아... 그녀는 다시 말을 더듬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요

 

그토록 조용하고 놀라는 일 없고 단순한 그녀의 태도는 관습을 옆으로 제쳐 두게 했고

그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은 오랜 친구를 이렇게 따로 만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나는 당신이 왜 돌아가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당신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 고백을 그보다 밋밋하게 또는 그 말을 듣는 상대에게 우쭐한 감정을 전혀 안겨 주지 않는 어조로

전달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나한테 이런 무미건조함 뒤에는 섬세하고 예민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어 이에 비하면 내가 다른 세계에서

아끼던 것들조차 값싸게 보인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은 당신이에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에게 유일한 공포는 자신의 어떤 행동으로 그녀가 말하는 소리와 인상이 지워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고

유일한 생각은 이제 다시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에게 몰락감과 허무감이 밀어닥쳤다 두 사람은 지금 세상에서 안전하게 격리된 채 서로의 곁에

있었다 그렇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다 해도 무방할 별개의 운명에 묶여 있었다

 

당신에게 너무 가혹한 인생이에요

-하지만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된다면 상관없어요

그리고 내 인생이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인가요 우리 두 사람에게?

-그게 전부 아닌가요?

 

그거 알아요? 내가 당신을 자꾸만 잊는다는 거?

-자꾸만 잊는다고요?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언제나 그래요 당신을 만날 때마다 모든 게 완전히 새로워요

-그래요 나도 알아요! 알아요!

혹시 ... 당신한테도 내가 그런가요?

 

당신은 내 평생 가장 솔직한 여자예요

뭐라고 말하건 간에 당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봐요

 

그는 이렇게 미적지근한 신혼여행처럼 열정의 온기는 없되 의무들은 잔뜩 지고 사는 데 진력났다

 

탁자 옆에 앉아 램프 불빛을 받고 있는 메이를 보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

그리고 다른 집과 지붕과 굴뚝들을 보며 자기 인생 바깥의 다른 인생들

뉴욕 너머의 다른 도시들 자기 세상 너머의 온 세상을 느껴 본다는 사실에 머리가 맑아지고 숨쉬기가 수월해졌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어둠 속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뉴랜드 창문 닫아요 그러다 감기 걸려 죽어요

그는 창틀을 내리고 죽는다고! 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었어 나는 지금 죽은 사람이야 벌써 오래전에 죽었어

그렇게 말장난을 하다 보니 불현듯 흉칙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죽은 게 그녀라면 그녀가 죽어서

그러니까 곧 죽어서 자신을 자유롭게 해준다면

 

엘렌 올렌스카를 사랑하는 일이 레퍼츠같은 사람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아처는 처음으로 개별적 사례의 두려운 논리와 맞닥뜨렸다

엘렌 올렌스카는 다른 여자와 달랐고 그 역시 다른 남자와 달랐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황은 다른 누구의 상황과도 비슷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 아닌 어떤 심판대에도

설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녀에게서 전통과 훈련이 빚어 놓은 자아와 진정한 자아를 분리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엘렌스카를 떠올리면 책이나 그림에 나오는 상상의 애인처럼 추상적이지만 고요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모든 것을 한데 모은 영상이 되었다

희미하고도 끈질긴 그 영상 덕분에 그는 다른 여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초조와 안달 속에 보낸 처음 몇 년 동안 아처는 자신이 파리로 돌아가는 장면을 자주 떠올렸다

그런 뒤 개인적 환상이 희미해지자 그 도시를 마담 올렌스카의 삶의 배경으로 그려 보려고 했다

밤에 집안 식솔이 모두 잠자리에 들면 그는 서재에 혼자 앉아서 마로니에 나무가 늘어선 대로에 찬란하게 터져

오르는 봄 공원을 밝히는 꽃과 조각상들 꽃노점에서 풍기는 라일락 향기 거대한 다리 아래로 웅장하게 흐르는 강물

대동맥을 터질 듯 가득 채우는 예술과 학문 쾌락의 인생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던져 버릴 수 있는 여자 말이에요

물론 그러시지는 않았지만

댈러스가 계속 놀라운 말을 이어갔다

돌아가시기 전날 어머니가 저를 따로 불렀던 거 생각나세요?

그때 어머니는 예전에 어머니가 아버지께 부탁드리니까 아버지가 인생에서 간절히 원하던 것을 포기하셨다고요

 

어쨌거나 누군가는 그의 고통을 알고 연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심장에서 쇠 심 하나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아내였다는 것은 더없이 감동적이었다

 

아처는 마담 올렌스카가 앵발리드에서 방사상으로 뻗어 나가는 대로 한 곳에 딸린 광장에 산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다녔을 극장 그녀가 바라보았을 그림 그녀가 드나들었을 엄숙하고 화려한 고택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을 사람들 사상과 호기심 이미지와 연상의 끊임없는 활동을 생각했다

그리고 한 때 어떤 젊은 프랑스인이 그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아 좋은 대화 세상에 그것만 한 건 없죠

 

나는 저기 올라가는 것보다는 여기 있는 게 더 맞아

뉴랜드 아처는 천천히 일어나 혼자서 호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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