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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0 이하의 날들 - 김사과

by librovely 2017. 6. 28.

0이하의 날들                                                        김사과                      2016                         창비


김사과

작가 이름부터 예리한 맛이 있다

사과라는 말이 뭔가 날카롭고  무미 건조한 느낌이 드는 것 기분탓이겠지 ㅋㅋㅋ

설탕의 맛이라는 책이 뭔가 상당히 다르다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재밌었기에 도서관 신간 코너

에서 김사과 이름을 보자마자 뽑아 들었고 빌려온 책 중 가장 먼저 읽기 시작했을 거다 아마...라고 쓰는 이유

는 이미 읽은 지 한 달이 더 된 책이기에...읽은 책도 본 영화도 많은데 블로그에 글을 안쓰고 있다 왜지?

잠이 늘어서....인듯 예전에는 새벽 2시가 정상 취침 시각이었는데 요새는 12시에서 1시 사이에 필름 끊김

늙어서 그런가...운동을 열심히 해야겠.... 하여튼 이 책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기대해서 그런지

아니면 작가가 어려서 그런지...어리다고 어쩌고 하는 이유는 뭔가 글을 읽다가 묘하게 어? 하는 부분이

뭐랄까 치기어리다는 표현이 생각나는 부분이 있었던 기억이...그게 뭔 소리냐면...괜히 쉽게 쓸 수 있을

내용을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로 난해하게 쓴 것처럼 느껴져서?  는 내가 못 알아들어서 그렇게 오해하고

싶었던 게 이유일지도...뭐가 그랬던건지는 읽은 지 오래 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그런데 발췌하다보니

글이 좋긴 좋다.... 김사과 글 잘 씀....내용 좋음.....익숙한 것들을 한 발 떨어져서 관찰하고 또 해석하는  게

재밌다 

좋은 책이다 

진짜에 대해 쓰려고 한 책이라서 좋다고 느낀 것 같다....








 

공허감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결국 비탄 속에서 온몸이 마비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울하고 섬세한 여행자에게

작은 기쁨을 안겨줄 정도로 괜찮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비된 채 앉아 있기에는 너무 많은 더 나쁜 날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몇 년 전 뉴욕에서 경험한 것이 전형적인 힙스터 문화임을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행에 민감한 일본인들을 비꼬아 문화적 화전민

이라 부른 적이 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미테 그 다음은 프리드리히스 하인 그 다음은 크로이츠

베르크 이제 노이쾰른 나는 오년 뒤 이 동네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행객들이 밀려오고 집값이 오르고 이국적인 바와 레스토랑이

유기농 마켓이 아메리칸 어패럴 자라가 들어올 것이다
사실 그것은 서울의 홍대 앞에서 뉴욕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 샌프란

시스코의 미션에서 똑같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다

젠트리피케이션

힙스터

 

힙스터는 최신의 소비자본주의 사회가 잉태해낸 최신 유행 목록으로

우회해서 밖에는 나라는 존재를 표현할 줄 모르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극단적인 초상이다

포스트모던한 자본주의의 실체

 

우엘벡의 이 소설에는 여자들을 따라다니며 한 번만 자달라고 애걸하는 찌질한

남자가 빠져있다 인간의 가장 유치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독자의 가슴을 울리

는데 그 유치한 짓들의 밑바닥에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이 유치한 남자 반대편에는 애착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무감각하지만 매력

적인 절망했지만 통찰력 있는 그래서 언제나 예쁘고 똑똑한 여자들이 주위를

서성거리는 달관한 남자들이 있다

 

배수아가 현실에서 안정된 서울의 공무원의 삶을 버리고 낯선 베를린으로

간 것처럼 이바나의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온 도시를 버리고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은 흔한 여행이 아니다 무료한 삶을 견디는 중간계급에게 보답처럼

주어지는 여가로서의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추방자의 운명으로 내모는 여행이다

 

우리 삶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죽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죽기 직전의 커트 보네거트가 그렇게 썼다

 

나는 두려움 속에서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주 아파서가 아니라 허무해서 울었고 그보다 자주 웃기 시작했고

마침내 어느 순간 이 고통은 영원히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죽는 날까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기뻤다

 

사람들이 작가에게 갖는 선입견과 달리 나는 책을 애호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책은 신경안정제 헐리우드 영화 인터넷야동 스마트폰게임과

경쟁한다 독자의 수가 날로 줄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독서광에 가까웠다 그저 시간을 때울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다

 

어딘가 쓴 적도 있는데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 썼다

절망 속에 있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견디기 위해 오직 나를 구원하기

위해 치유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해관계를 넘어선 인간관계란 가족 말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도 없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한국어 글쓰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교육 수준 삶의 궤적이 아니라 정신 상태다 수많은 댓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한 입장이나 글쓴이에 대한 사회적 정보가 아니고 이걸

쓴 사람이 미쳤나 덜 미쳤나 제정신인가 맛이 가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삶을 정면으로 보는 것 언제나 똑바로 마주 보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서 이해

하는 것 마침내 이해하게 되는 것 그 자체로서 그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치우는 것

예순의 나이에 자살한 그녀에게서 떠올리는 것은 성숙과 나이 듦 보다는 여전히

시퍼렇게 빛나는 예민한 정신이다 버지니아 울프

 

죽음을 모르는 늙음은 이상하다

삶은 죽음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을 이해하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가족 외에 무엇도 지키거나 발전시키지 않은 우리 사회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가족 문제에 대단히 무력하다

우리에게 가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외도 같은 극단적 처방을 통해서라도 망가진

가족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그 바깥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피가 부르는 고통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가족이 아닌 다른 식의 관계와 세계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젊음이 지나가는 것을 애석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젊음을 포기하는 것이

결국 자유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이 듦 성숙이란 대체로 사회적

제약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뜻한다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것은 물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무들을 자유와 맞바꾼다 혹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고독 혹은 사회적 고립

에 대한 공포를 그런 의무들로 무마하려 한다 결국 젊음과 함께 자유 또한 떠나

보낸다 하지만 자유란 젊음의 다른 이름일 뿐인가?

 

사실 서구에서 자살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기독교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자살로 생을 마치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 이었다

 

솔직히 우리들은 별로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닐까?

모두가 연애를 하지 않은 채로 그저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이유는 유리의 삶에 연애가 별로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유럽으로 몇 번 여행을 갔는데 그때마다 느낀 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친구가 많고 연애전문가이며 파티에 미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이들은 너무나도 순수하게 개인으로 존재해서

친구나 연인 그리고 파티라는 이름의 관계망이 없다면 완벽하게 고립되어버리고

말겠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10대 후반에 가족을 떠나 생경한 도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처지였다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유럽 사회는 어머니가 챙겨주고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타인들과의 관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어떤 막연한 낭만적 환상이나 주위 압력 때문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절실하게

타인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친교든 연애든 혹은 동네파티든 근본적으로 성립이 어려운 이유는

모든 것이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끈끈하게 달라붙은 채로 지내면 친구든

애인이든 별로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어버린다 물론 연애는 가족이 충족시켜줄 수

없는 무엇을 준다 하지만 죽고 못 살 정도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부모는

자식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제적 감정적 사회적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한다

문제는 그런 식의 절대적 안정성에 익숙해지면 불확실한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극히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믿을 것은 가족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친구도 사랑도 영원하지 않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것은 어쩌면 진리다

하지만 저 확실성을 벗어나지 않는 한 새로운 세계는 펼쳐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실패한다

그리고 그 실패가 멈출 때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졌다고 말한다

연애는 이 과정을 좀더 극적이고 응축된 형태로 겪게 해주는 기제라 할 수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애정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하나의 필요이며 그 필요는

고독에 의해 가능하다 그런데 가족 속 인간에게는 그 고독이 결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