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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아웃사이더 - 콜린 윌슨

by librovely 2008.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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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콜린 윌슨                      1974'            범우사



이 책은 왜 읽었는가?
사상서...사실 이런 책 전혀 안 읽고 살아왔는데...요즘 이런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젠 나이도 30이 넘었는데 정신연령은 영 나날이 회춘...외모만 열심히 나이에 맞게...아니 너무 달린듯?ㅡㅡ;;
나이에 맞게고 뭐고 다 농담이고...이런 류의 책이 가장 생각에 변화를 준다...
가격 대비  페이지 수 대비 효과 만점?


읽은 사상서라고 해봤자 에리히 프롬의 책 몇권이 끝.
그래도 그 책들이 내 머리속을 많이 바꿔놓았다. 무엇보다도 인생이 읽기 전보다 1.78% 정도? ㅎㅎ 더 자유로워
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왜 이런 뜬구름으로 보이는 책들이 필독도서에 오르고 꾸준히 읽히는가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뭔가 많이 모르고 살고 있다. 꼭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최소한 나는 그랬다. 지금도 그렇고...


콜린 윌슨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몇 달 전 갑자기 책을 사고 싶어서 교보문고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 책 저 책 방황하다가 범우사의 책을 검색했는데 이 책이 보였고 클릭해서 설명을 읽어보니 구미가 확~~
독학을 한 24살짜리 청년이 쓴 이 책이 사회에 아주 큰 파장을 가져왔다는 것...궁금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제목도 아웃사이더... 재밌게 생겼다... 결국 안 사고 도서관에 가서 직원을 서고에 심부름?보내는 만행을
저지르고 대출받아왔는데 읽으면서 살 것을 그랬군...이라는 후회가 들었다... 이 날 시뮬라시옹도 사려고
했는데...역시 이 날 책을 샀어야 하는 것이다...이런 책은 전혀 돈 아깝지 않은데...그리고 무엇보다도
방에 놓아두면 잘난척 하기에 그만이지요~~!! 물론 수시로 뽑아 읽을만한 내용(아무리 뽑아 읽어도 절대
이해가 되지 않아요~ ㅎㅎ)


아웃사이더...
외톨이? 부적응자? 괴짜?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아웃사이더란...보통의 인간들(대표적 인간 나 되겠음.자랑은 아님...)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그 생각이 무엇을 말하느냐...인간이면 꼭 생각해봐야 정상으로
보이는 그런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나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삶이란 무슨 의미인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 이유가 있는가?


어라...이 질문들은 내가 일요일의 낮잠에서 깨어난 후 우울하게 앉아서 하는 생각들이 아닌가...
그럼 난 아웃사이더? ㅎㅎ 그건 아니다. 난 아주 가끔 대비못한? 여유의 시간에 저런 질문을 떠올리고
그 질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허무해...우울해...무서워....이러다가 재빨리 TV리모콘을 찾거나
주변의 읽을거리를 집어 들어서 읽어대거나 냉장고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어버린다.


저자는 아웃사이더들만 저런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누구나 저 생각을 한다...
물론 그 생각을 얼마나 발전시키느냐에는 분명 극심한? 차이가 있겠지만...
일부의 사람은 자신의 우울함이나 바닥을 치는 그 허무한 기분이 어떤 이유인지 의식을 못할 수도 있겠다.
나도 가끔은 질문 자체도 떠올리지 못하고 근거가 있으나 근거가 없는 허무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곤 하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가능하기는 하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우울증에 걸리나 심하면 발광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쩌면 더 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지만...인간과 인생의 실상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병적인 증상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더 이상한 소리를 해볼까? 난 사실 종종 찾아오는 허무함과 우울함의 순간에 이대로 이 기분에 침잠해 버리면
미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었다...아주 뚱뚱한 여인을 바라보며 나도 한 달만에 저 정도로 살 찔
자신이 있어...라며 친구와 농담하는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뚱뚱함을 비하하자는 말이 아니고...


이 책에는 아웃사이더의 기질을 보이다가 결국 광기에 이른 고흐나 니체...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다고 콜린 윌슨이 자 우리 다같이 미칩시다...라는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더 잘 살기 위해서
이들 아웃사이더처럼 제발 생각 좀 하고 삽시다..하는 의미로 쓴 책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지금 나는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는가? 음... 사실 이 책도 쉬운 책은 아니다.
그의 글 자체가 일단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사는 그것들 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고
또 콜린 윌슨은 자신의 생각을 아웃사이더였던 여러 학자나 예술가의 저작이나 삶을 통해 들려주기에
일단 그가 언급한 것들을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요지는...읽긴 했으나 내가 읽긴 했나요? 라고 뇌까리는 중이라는 것....


콜린 윌슨은 노동자 계층의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기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교육이 필요없는 비숙련 노동일을 하면서 틈날 때 혼자 공부를 했던 것...그리고 24살에 이 책을
써서 선풍적인 인기와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알랭 드 보통이 그 유명한 에세이들을 20대에 썼다는
사실보다 더 놀랍다...얼마 전 본 굿 윌 헌팅의 주인공도 살짝 떠오른다...불우한 환경...노동과 독학이라....
이들은 진정한 엄친아...? 학원 과외도 필요없고 게다가...학교도 필요없고 부모도 필요없다? ㅎㅎㅎ



이야기의 시작에서 카프카와 알베르 카뮈, 헤르만 헷세가 등장한다.(내가 좋아하는 우울한 내용...실존주의?)
다행히 이 세 작가의 책은 한 권이라도 읽었기에 재밌게 시작했는데...그 다음에 등장하는 작가와 책들의 내용은
전혀 접한 내용이 아니라서 @$%&*#!# 이었다....

더 길게 써 봤자 다 헛소리고 발췌를 해야겠는데 베낄 내용이 너무 많아서 난감하다...









제1장 맹인의 나라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바르뷔스는 <지옥>의 주인공이 아웃사이더가 되었던 것은 그가 너무 깊은 내면을 본 때문이라고 시사하면서도
이 주인공은 한 범인凡人이라고 한다.

아웃사이더가 예술가일 수는 있지만 예술가가 반드시 아웃사이더인 것은 아니다.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아웃사이더의 기본 태도인 인생의 부정
인생은 꿈이지 결코 현실이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았을 때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

웰즈는 사상은 생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하는 실존의 문턱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아웃사이더라는 것은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맹인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가 왕이다. 요컨대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명 속에서 자기가 병자
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웰즈의 소설 <맹인의 나라>에서)

사르트르는 참여의 논리에 까뮈는 계속해서 아웃사이더로 남으라는 신념에 각각 도달했다.

로깡땡은 너무 명민하고 정직한 관찰자였다는 것이다.

일상 생활은 나날의 사건에 좌우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면 그들의 존재는 중단될 것이다.
그것은 속물들을 보았을 때 심화된다.

적나라한 생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한 사람만이 필연성이 존재했던 것과 같은 착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제2장 무가치한 세계

아웃사이더는 사변도 철학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단 하나 중요한 구별은 존재와 무

뫼르소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그의 정직함이다. (잘난척하고 싶어지는 대목...ㅋㅋ)

카뮈와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두 사람의 공통점에 감동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뫼르소나 크레브스와 똑같은 입장에 있다.
비현실감에 지배되고 있는 사람에겐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다.

죽음에 직면해야 비로소 자유를 깨달을 수 있으며 자살자나 사형수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여도 활동적인 생활인
에게는 자유를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아웃사이더는 지금까지 알았던 현실보다 고차의 현실을 잠깐 본다.

사르트르나 카뮈나 헤밍웨이가 암시하고 엘리어트나 올더스 헉슬리가 분명하게 제시한 이 주제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강하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환경의 노예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데로 귀착한다.




제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일지라도 플라톤적인 이상가이며 꿈을 꾸는 사나이라 자칭한다면 부르주와들은 기꺼이 그의 존재의
권리를 인정해 준다.

낭만적 아웃사이더는 별세계를 꿈꾸는 자이며 그가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은 것은 본질적으로 몽상가이며
공허한 날을 노래하는 한량이기 때문이다.

암흑세계에 내려가는 것은 반드시 악이 아니며 지성과 대담성의 필연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

혼돈을 직시해야만 한다. 진정한 질서가 오기 전에 혼돈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이것이 햇세의 결론이다.

헷세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하는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소설을 이용한 소설가인 것이며
인생을 되는대로 사는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을 가진 인간은 자연히 아웃사이더인 것이다.

스크린 광경에 자기의 희망과 욕망을 투영시키던 인간들은 별안간 자기들이 영화관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질문한다.
우리는 무엇일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선고'를 받는 것이다.




제4장 자체의 시도

본 장에서 고찰하려는 세 사람의 인물은 하나의 불행한 특징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바르뷔스의 주인공처럼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무엇을 받을만한 가치도 없다고 믿는 것이다.

아웃사이더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기를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바르뷔스의 아웃사이더와 똑같이 너무 깊이 너무 많이
보아버렸기 때문에 사회에서 행복해질 수가 없다.

가능한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만 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인생은 우리들의 것이 되고
인생을 쉽게 붙잡음으로써 인생을 정복하는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인생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것이며
인간의 능력이 미치는 한에서 자유로운 성실함이고 인생 최후의 한가함이다.

행위보다는 오히려 무위를 진전

사색하고 분석하며 자기 속에 침잠한다.

고흐의 일생은 데미안에서 헷세가 말한 바 모든 인간의 일생은 자기에 도달하는 길, 자기실현의 길이다. 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그는 화가가 아니다. 매체로서 우연히 그림을 선택한 아웃사이더이다.

발레 무용가 바슬라프 니진스끼
결혼 이후 수년간 니진스끼는 아웃사이더에겐 최대의 적인 일상사에 몹시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것에 마음이 초조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서는 못견디게 되었다.
발광선고...
자기세계에 틀어박히려던 그의 욕구가 너무나 오랫동안 부정되었던 것이다.
니진스끼의 인생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장은 "내 처를 비롯한 전 인류의 인생은 죽음이다."
어느 밤 산책을 마친 후 휘황한 호텔 앞을 지날 때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이러한 곳에서 영위되는 인생이 죽음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인간은 즐거워하고 신은 탄식한다. 그는 인간의 허물이 아니다."

인류는 천박한 사고가들이며 자기 안으로 은퇴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러므로 자기 본체가 무엇인지 알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자기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불행은 결코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니진스끼는 고호와 같이 알고 있었다.




제5장 고뇌의 역


한 가지 겉치레의 질서를 사람은 느끼리.
이 질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람은 진실이라 볼 것이다.
비현실의 도시
-엘리어트

그들의 페시미즘을 더욱 추진시켜 극한에까지 민다면 인생을 완전히 부정하는 니힐리즘이다.

전에 느끼보지 못한 인생의 덧없음이 자꾸만 깨우쳐졌다 - 윌리암 제임스

돌연 번갯불같이 불안이 내게 닥쳐와 몸 전체가 뼛속까지 벌벌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는 까닭 모를
광기에 가까운 저급한 공포이며 이 상태가 10초도 못가서 나는 완전히 파멸되었다고 느꼈다. - 헨리 제임스

공포가 홀연히 닥쳐서 타인에게 유리되어 호소할 수도 없음
'파멸'이 어떤 형태로나 아웃사이더에 공통된 체험임

어떠한 신념을 갖든 그것이 자기에게 닥치는 운명과 무관하다는 이 공포는 곧 실존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근거다.

이런 불쾌한 체험을 의식한 결과 그에 의해 야기된 의문에 대한 어떠한 종교적 해결에 이르게 된다
종교의 근본 이념은 자유다.
아웃사이더와 자유가 항상 연관되어 있음
인간은 자기가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고 고민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아웃사이더가 된다.

아웃사이더에게 현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바르뷔스 - 인간성의 심부를 아는 것
웰 즈 - 영사막, 인간의 철저한 허무감
로깡땡 - 인간정신을 마비시키고 부정하는 실존
뫼르소 - 영광. 우주의 장대한 무관심. 절반쯤만 현실. 이들 어리석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현실은
            고요하여 변하지 않는다.

악을 직시하는 마음은 발광점까지 치솟아 버린다.
부정직이냐 발광이냐

이 문제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아웃사이더는 연마된 정신의 활동으로 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친 이단적
실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외에 아무도 없다.

카프카의 <단식하는 광대>
단식할만한 대단한 의지력이 있어서 단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입에 맞는 음식이 통 없어서였을 뿐이라고

인생에 대한 식욕의 결여
모든 인간의 행위엔 이와 동일한 허무의 낙인이 잇따른다.

기독교라는 것이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내게는 그런 것이 필요없다.
그러나 그것이 구제의 필요를 뜻하는 것이라면 존중할만 하다.
니체를 신앙가로 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니체는 고독에 익숙했다.
자기를 알고자 하는 욕구 아니 자기를 물어뜯으려 하는 욕구가 강렬하게 내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니체에게 준 것은 자기를 알기 위한 첫째 조건인 자기로부터의 탈피였다.

니체의 <국가와 종교>
논문의 주제는 종교 및 애국주의는 인민의 아편으로서 필요 불가결...

자기 극복자는 자기에게 더 이상 불만을 느끼지 않는 인간에게 참지 못한다.

니체는 완고한 학자들의 반대에 몰려 독단적인 자기주장에 빠져서
'나는 왜 그다지도 현명한가? 나는 왜 그렇게 훌륭한 책을 쓰는가? 하는 제목을 붙이기에 이른다.
종말이 온 것은 1889년(고흐의 발광과 같은 해)이었다. 그는 기이한 편지를 쓰기 시작하여...
케사르라느니 나폴리 왕이라 서명하는가 하면 보다 의미심장하게 십자가에 못박힌 자라고 서명하기까지 했다.
(진중권도 이와 비슷한 농담을 했던데.. 니체 이야기로 농담을 던진듯...)

니체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외에도 5.6권의 작품은 정통해야 한다.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악을 넘어서
도덕 계보학
이 사람을 보라(자서전)
권력에의 의지(니체 사후 그의 누이가 편집한 다소 의심스런 저작...)
팡세

니체는 항상 고독했다. 결혼을 한 일도 정부를 가진 일도 없었으며 우리가 아는 한 매춘부 이외의 여자와
관계를 맺은 일도 없다. 생존시 그를 찬미하던 자는 다섯 사람도 될까 말까 하였다.
어느 때 그는 한 사람을 통해 젊은 부인에게 구혼을 하였으나 여인은 그를 거부하고 그의 친구와 결혼해 버린
일도 있었다 (루 살로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는 영원한 부정의 최악의 상태를 알면서도 초인적인 노력으로써 그것을
소화하여 거기에서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초인과 영겁회귀
영겁회귀는 실존주의를 절대화한 개념이다.
궁극적인 신앙의 태도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은 수렵이나 투우 전쟁과 같은 극도의 흥분에 몸을 맡김으로써 어리석음을 회피할 수
있었다.

아웃사이더에게는 자기가 태어난 세계는 반드시 무가치한 세계이며 어디까지나 목적과 방향을 찾는 그의 의욕에
비하면 세속인이 사는 것은 인생이 아니라 표류로 보인다. 이것이 아웃사이더의 비참한 점이다.

사르트르적인 참가의 교리
모든 인간의 귀에 입을 대고  "잠을 깨라!"고 고함치고 싶은 욕구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이 해야할 일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사상가가 아니며 위대한 사상가는 예술가가 아닌 것이 보통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을 보유하는 대인물을 낳은 극소수의 나라 가운데 하나가 러시아다.
러시아가 낳은 두 사람의 대작가에 주목해야 한다.




제6장 동일성의 물음

아웃사이더는 자기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하나의 자아는 발견하였으나 이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그의 중요한 임무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구제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라고. 이에 대한 해답이 스트로드의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라면 구제의 가망은 없으며 목을 찔러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 스트로드의 해답은
이 질문에 대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없으며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

악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찌른다.

50대의 톨스토이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내가 살아야 하는가?
왜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는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러나 그는 이미 15년 전에도 <전쟁과 평화>에서 삐에르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악이란 무엇일까?
선이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인간은 사는 것일까?
나는 무엇일까?
생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일까?

톨스토이의 체험은 로깡땡의 그것과 같이 시작된다.
5년 전부터 매우 이상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처음 나는 인생이 사라져버린 듯한 복잡과 억압의
순간을 경험하였고 어떻게 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하였다. 그 때까지 내가 서 있던 발판이 무너져
내가 디딜 곳이 없어져 버렸다고 나는 느꼈다.

타인을 사랑하고 자선을 실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자기애가 다시 다른 형태로 나타날 위험성이 다분
자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멸시의 순간이다.

나는 무엇일까? 이것이 아웃사이더의 마지막 문제다.

이는 재미있는 문제다. 실체란 무엇일까? 아침마다 런던까지 전철 통근을 하는 사람들. 신문을 읽거나 건너편
좌석 위 광고를 읽거나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혀 의문을 갖지 않는다.

아웃사이더들은 다만 자기가 감옥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탈출하고자 열망한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지하 생활인의 수기> <죄와벌> <까리조마프의 형제>이다.

행할 보람이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딱정벌레적 인간의 문제

범죄인은 범죄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암흑의 구렁텅이로 내려가 성자만 도달할 수 있는 선악의
해소점에 한 걸음 가까와지게 된다. 죄를 통한 구제라는 관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테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대부분의 인간이 인간답게가 아니라 동물처럼 죽는다고 하는 헤밍웨이의 태도와 같은 것
그는 모든 생물은 왜 죽음보다 삶을 택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전 지능을 쏟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제7장 거룩한 합일

지나치게 생각에 잠기는 인간은 자칫하면 피로의 극단으로 흘러 그에겐 세계가 그늘진 관념의 일람표와
같이 비쳐질 우려가 많다는 점

인간의 배후에는 심연과 허무가 입을 벌리고 있다. 아웃사이더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심연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생에 쇠못을 처박고 무관심한 부르주와 보다 강렬하게 인생을 파악하고 건축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웃사이더의 임무다.

아웃사이더가 품은 무상감은 자기를 보다 강인하게 하기 위한 생물학적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사실인즉 그것은 보다 충실한 인생을 보낼 수 있게 하는 수단

범상한 대낮의 세계를 떠나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는 무인지대에 들어가면 그 때 인간은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다.

보통 인간의 마음이란 현재의 자기에게 직접 필요한 사물에 대한 의식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30분 내에나 혹은 하루 혹은 한 달 안에 하고자 할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 책을 놓은 후엔 어떻게 될까? 이번에 독자는 자기의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과연 현실인가?
비현실인가? 두뇌만은 제법 진지한 척 모든 것을 의심하는 척 하지만 의자니 장롱 화로 같은 물건에 대해선
결코 의심하지 않으며 내일이나 모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무엇이며 인생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깨닫는 궁극적인 지식을 지닌 채
자기 인생에 직면할 수 있을 때까지 이것이 언제까지나 따라다닌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꿈을 꾸는 동안은 자기가 꿈을 꾸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떤 자는 꿈꾸면서 꿈을 해석하기도 하나 이들은 꿈에서 깨어나 비로소 꿈임을 알게 된다.
그와 같이 멀지 않아 위대한 각성이 올 때 그때 인간은 인생이란 커다란 꿈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 달콤한 인생이 떠오른다...)

평상시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심원한 자각, 인간은 자기가 세계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얻게 된다.



제8장 비젼의 아웃사이더

죠지 폭스
주여 젊은이는 저렇게 허무한 놀음에 정신이 팔리고 늙은이는 범사에 빠져 있나이다.
모든 인간을 저버리사 모든 인간이 서로 모르는 남이 되도록 하소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블레이크
인간은 혼자서 태어나서 혼자서 죽는다. 타인과의 관계를 조장하여 본래의 고독을 잊어버리는 자는 바보의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태반은 예견도 회록도 하지 않고 순간적인 생활을 보낼 따름이다.

블레이크
만약 인간이 실제적인 일에 관여하는 시간을 줄이고 비젼 능력을 기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누구든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적인 정신을 갖는 것)

블레이크
사람은 각자의 요기에 지배되리
인간성을 자각하여
호수 속에 요괴를 버릴 때까지

요괴는 인간의 죽은 부분, 의식의 부분이며 인간은 그것을 자기 자신이라 생각한다.
개성 습관 아니 자기 본체라고 착각하고 있다.

블레이크의 논지를 요약해보자. 모든 인간은 비젼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릇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벌어서 쓰는 생활 때문에 너무나 긴장돼 있다. 그러나 비젼 능력이
부족한 것이 본인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주위 세계의 탓이다. 생존을 위해 벌어서 쓰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책임의 일부는 세계에 있다.

비젼 능력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찾아든다. 인간이 안일한 상태에 있을 때는 세계에 있는 모든 나뭇잎
한 점의 먼지, 그 모두가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별세계가 된다. 겨우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돈과 음식
에만 급급하여 내일 일을 개의치 않는 명상 시인이나 현자야말로 이상적인 인간이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인보다 동양인에게 한결 친근할 수 있는 생각이다.

예이츠
인생을 비극으로 여기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살게 된다.

대부분 인간은 목전의 육체적 필요 외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다. 마음 붙일 일과 오락이 없는 사막의 고도에
그들을 보낸다면 그들은 발광하여 버릴 것이다. 그들에겐 진정한 동기가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감옥에 살고 있다. 일반인이 지닌 이 허무의 숙명에서 개인은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꾸물거리지 말고 비젼을 볼 힘을 길러라. 이것이 블레이크의 해답이었다.





제9장 회로에서의 탈출

문명 생활이라는 것은 주로 표면적인 것 지나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들은 지나친 것이 필요 없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여가이며 자유다.

비젼의 인간은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다.
세계가 동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의 영혼도 동적이라는 것

나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고독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있지만 일부러 고독하게 되어 보면
새로운 체험에 자극을 받는 편이 자기를 아는 데 적합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유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제일보로서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루드셰프
자기 및 타인의 행위를 관찰하여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행위가 얼마만큼 있는가를 자각하는 방법
제1의 상태는 수면이다
제2의 상태는 보통의 부르주아 생활 태도인데 이것은 눈뜨지 않는 의식이라고 비꼬아 부르고 있다.
제3은 자각의 상태이며 제4는 객관 의식의 상태다.

그루드셰프는 불안이라든지 혐오 혹은 분노라고 말한 소극적 감정에 인간은 놀랄 만큼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천사들은 인간의 체내에 쿤타이퍼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이 기관은 인간의 눈에 환상을 현실로 비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 인간은 그때부터 완전한 자기 꿈의 포로가 되어 달에 식량을 공급한다고 하는 본래의 일을
훌륭히 수행하여 금일에 이르렀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놀랄만한 속도로 파멸을 향하여 돌진한다는 사실이며 적어도 몇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는 능력을 본능적으로 성장시킬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아웃사이더...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철학의 목표는 지성적으로 논리가 정연한 체계가 아니라 개인의 구제다.

자기 보존 본능이 내면의 확대의 고통에 반항하고 정신적 태만에 기울기 쉬운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파도같이
높아져 가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손으로 만진 체험의 양을 한정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존재의 민감한 부분을 그것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드러내 보이며 어떻게 하든지 전체로서
사물을 보려고 고투 하는 것. 그것이 개인에게 맡겨진 문제다. 개인은 이 긴 노력을 아웃사이더로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자로서 마칠지도 모른다.




자전적 후기

12세 이후로 나는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혀 왔으며 모든 인간의 가치들이 단순한 자기 환상만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왔다.

14세에 나는 버나드 쇼의 <범인과 초인>을 읽고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후로 나는 엘리어트의 <황무지> 괴테의<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었다.

나는 <아웃사이더>의 성공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어쨌든 사람들, 즉 끊일 새 없는 파티와 리셉션 그리고 나를
이른바 인간중독의 감정 속에 빠져 있게 하는 새로 사귄 사람들의 무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웃사이더의 근본 문제는 일상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 거부이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
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어떤 때는 정신 세계에 머무를 수 없다는 묘한 무력감을 의식한 경험을 갖고 있다. 만약 당신이
한 자리에 앉아서 두꺼운 책을 완전히 독파하려면 당신의 눈도 피로해질 뿐만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도덕적으
로도 더욱 타락하여 어쩌면 병에 걸린 듯한 느낌까지 갖게 된다. 우리는 정신 세계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인간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아직까지도 단순한 동물이다.

개념이란 의도이다. 당신은 자각할 수 있도록 무의식적인 의지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자연적인 관점의 이러한 세계로부터 떠나게 되는 그러한 방법으로 정신을 사용하여 그것을
비판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다. 이 후자는 바로 현상학의 요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