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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 이주윤

by librovely 2020. 7. 5.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주윤                       2019              한빛비즈

 

이주윤의 책이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재미있다

아주 재미있다

특히 여자들 특히 소개팅 주구장창+엄마 잔소리에 노출되었던 사람은 아주 많이 공감 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이미 수년 전 일들이라서 추억 소환 ㅋㅋㅋㅋ 나이 드니 좋은 건 그거 하나인듯....

 

 

 

 

 

몇 살인데? 어디서 만났는데? 돈은 얼마나 버는데?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는데? 키는 커?

부모님은 뭐하시는데?

제 뱃속에 열 달 동안 품었던 딸이 세상에 나와 무얼 하며 사는지 궁금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 어미 뱃속에서 지냈던 그 열 달이 전연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는 어머니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외사랑이 애달프게만 느껴졌다

엄니 지말 나헌테 집착 마시고 엄니 삶을 사셔

아유 나는 니가 좋은 걸 어떡해애애애애

여자는 생각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을 낳지 않겠다 그리하여 내 어머니처럼 자식을 궁금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겠다

 

아빠는 내가 괜한 고집을 부리며 결혼을 하지 않는 거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결혼하고 싶어했던 몇몇 남자들이 나와 결혼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세른 셋의 나는 안다

남자가 술에 취해 하는 말은 순정이 아닌 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술에서 깨고 나면 기억조차 못 할 말들에 혼자서 가슴 설레하는 바보짓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

 

버커리가 뭔데

국어 사전을 찾아 보니

늙고 병들거나 고생살이로 쭈그러진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나에게 연애란 곧 노동이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억지웃음을 지어주는 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연락하며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고하는 일

가끔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생각을 애써 설명해야만 하는 일

 

은희경 가라사대

자고로 결혼은 아무하고나 하는 것

 

국물용 멸치같이 생긴 남자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남자와의 한 시간을 말해 무엇하리오

간략하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얼굴 밥맛 구강구조 밥맛 먼지 탄 검은 코트 밥맛 손가락 없는 초록색 장갑 밥맛 취미생활 밥맛

관심사 밥맛 밥맛밥맛 밥맛의 결정체

그 남자는 나에게 말했다

자기주장이 굉장히 강하시네요

알아 안다고 아니까 닥쳐

 

새벽 두 시만 되면 남자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오래 전에 헤어진 남자 오며 가며 알게 된 남자 술김에 전화번호를 줬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남자

심지어는 장성한 아들과 살뜰한 마누라가 있는 남자에게서까지 면면이 가지각색이지만 자니? 하며 말을

붙이는 것만틈은 그들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겠다

그냥 한 번 찔러나 볼까? 하는 거겠지 다른 여자들에게도 같은 짓거리를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장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는 이유는 나 역시 심심하기 때문이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쥐죽은 듯 조용하다가 달이 뜨고 나서야 나를 찾는 남자들에게 나는 도대체 무얼 기대한걸까

 

겉모습은 마흔일곱쯤 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른 아홉 밖에 먹지 않은 남자와 소개팅을 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는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밝혔다 어차피 사십 대로 보이는 마당에

올해 결혼하나 내년에 결혼하나 그게 그거 같은데 무어 그리 서두르실까

만난 지 삼십 분 만에 나의 가족 관계와 아버지의 직업은 물론 글을 써서 벌어들이는 돈은 얼마나 되며

자취방이 월세인지 전세인지까지 캐물은 걸 보면 말이다 무슨 면접관이라도 되는 양 나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골똘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뻔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마시고 자빠졌네

김칫국을 마셔도 너무 마신 그가 말했다

저는 있잖아요 주윤씨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른 건 제가 다 준비할 테니까 그냥 몸만 오시면 됩니다

배 속에 삼 개월쯤 된 애기를 넣어서 오시면 금상첨화고요 하하

그는 자기가 한 말이 굉장히 센스 있다고 생각했는지 호쾌하게 웃어댔다 그러나 정작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정자 운동성이 저하하는 그의 급박한 상황이야 백 번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초면의 여자에게 혼전 임신을 권하다니 지금 당장 손잡고 러브호텔에 가자는 말과 진배없이 느껴졌다

 

나는 결국 그림 보기를 포기하고 전시회장 구석에 앉아 그들의 행태를 관찰했다

<염병 떠는 연인들 전>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니 이것 또한 색다른 감상 포인트였다

 

 

송년회 때 장기 자랑을 하란다

안 하고 싶은데요 말했는데 무조건 해야 한단다 정말로 안 하고 싶은데요

다시 말했는게 그래도 해야 한단다

안녕하세요 이주윤입니다

제 장기는 글 쓰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글을 쓰겠으니 잘들 보십시오 해야하나

 

친구가 실연당했다 본인이 버려진 이유를 모르겠다며 괴로워했다

두 사람의 이별 사유를 내 나름대로 추측해보자면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든지 아니면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든지 그것도 아니면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을 것이다

 

엄마가 괜찮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남자들이 내 눈에는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체격이 좋다는 사람은 뚱뚱했고 믿음직스럽게 생겼다는 사람은 머슴 판박이였으며 멋쟁이라는 사람은

각설이 뺨치는 요란스러운 옷차림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들 역시 자기 부모에게 속아

나를 참한 색싯감인 줄로만 알고 선을 보러 나왔을텐데 웬 쌈닭같은 것이 시비를 걸고 자빠졌으니

 

나의 휴대폰 통화 내역은 엄마로 도배되어 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을 기억해 둔다

지하철에서 사람 밀치지 않기

공공장소에서 너무 큰 목소리로 얘기하지 않기

함부로 반말하지 않기

입 닫고 지갑 열기

젊은 척 하지 않기

쉽게 발끈하지 않기

길에서 남자가 전화번호 물어봐도 들뜨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