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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세상이 삶을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 톨스토이

by librovely 2008.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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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삶을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톨스토이              1998'               시인과촌장



몇 년 전에 톨스토이 단편집을 읽긴 했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뭐랄까. 너무 뻔한 착하게 살아라 시리즈로 느껴졌다고 해야할까...
세상과 동떨어진 구름 잡고 계시는구나...하고는 넘어갔는데...


얼마 전 읽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서 러시아가 낳은 대단한 두 인물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언급했기에 갑자기 관심이 생겼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뻔한 교훈이나 써대는 사람이...?하며....


찾아보니 톨스토이의 단편집은 상당히 많다. 출판사마다 단편을 묶은 것이 달라서 겹치기도 하고...음
이 책의 제목이 참 그럴싸해 보였다.
세상이 삶을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멋지군.
수십년을 살아온 지금도 왜 사는지 삶이 뭔지 알 수 없는 지경이기에 관심이...


연수를 받으러 2호선 지하철 안에서 인생의 쓴맛을 몸으로 체험하며 그 와중에 읽어서 내용이 사실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내용 자체야 복잡한 게 아닌데 오랜 시간동안 읽었다 말았다를 반복하다보니...어디부터가
이야기인지도 헷갈릴 지경...게다가 좀 피곤해야 말이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정말 2호선 강남역 방향으로 지하철 출퇴근을 하는 사람의 삶의 질은 아주 바닥을 칠 것
같다...난 그렇게는 못 살 것 같다...대책이 필요하다... 어찌나 사람에 치이는지...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기름값이 올랐다고 홀짝제 하라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말만 하지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 가능하게 만들어
줘야 하는거 아닌가... 요즘 대중교통 이용률이 30%가 늘었다는 뉴스를 본 것 같은데...덕분에 나같은 서민은
완전히 제대로 치이는 중... 그만큼 길은 덜 막히겠구나...기름값 변동에 아무 감각이 없을 가진 사람들은
요즘 살맛나겠구나...ㅡㅡ;;


퇴근 시간이야 1시간 정도 차이가 났지만 그래도 2호선에서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정말 책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그야말로 널부러지는... 퇴근 후 시간을 좀 과장하자면 내버리게 된다... 그렇게는 못살지...
알랭 드 보통이 어디서 그랬더라...? 대중교통을 탔을 때 인격적 손상을 입을 정도로 쾌적하지 못하다면
사람들은 능력이 안되더라도 개인차를 소유하려고 든다고 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땅도 좁고 기름도
안 나오고 비싼데도 서민들도 다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왜 2호선처럼
하루 이틀 문제도 아닌 것을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또 모종의 뭔가가 있는 거 아냐? 자동차 회사와
정유 회사의 로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가....지금...ㅡㅡ;;


하여튼 그렇게 고달픈 출퇴근으로 인해 이 책은 아주 얇은데도 불구하고 뭔가 어설프게 읽힌 느낌이 든다...
다시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밀려오는 느낌이...
그래서 독후감?의 내용이 헛소리로 채워질지도 모른다...완전 다른 줄거리르 읊어댈지도...


이 책은 두 가지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세상이 삶을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이야기의 시작에 어떤 사람이 이젠 가족이나 사사로운 것에서 벗어나 영혼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고 하자
사람들이 여태까지 평범하게 살다가 왜 갑자기 그러느냐...네 가족은 누가 먹여 살리느냐 등의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그런 결심을 막는다.


그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두 친구의 이야기다. 그 중 한 명은 종교 공동체에 들어가고 한 명은 세상에서
세상적인 틀에 맞게 산다. 그러나 그는 항상 뭔가가 결핍된 뭔가 잘못된 느낌을 갖고는 그 종교 공동체 생활
을 하는 친구를 만날 때마다 그를 따라 살까 고민을 한다. 그러나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세상의 틀에 맞게
행복을 추구하라는 압박이 가해지고 그는 자신의 내면을 외부의 소리로 덮어가며 계속 세상적인 삶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렇게 그는 예쁜 부인과 토끼같은 자식과 높은 사회적 지위도 얻는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계속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결국 그는 종교 공동체로 들어가고 거기에서 진정한 안식을 얻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내용을 말하자면 아주 간단하지만 두 친구의 대화가 아주 의미있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대화가 물론 내용도 의미있지만 주고받는 그 대화 자체가 논리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진
것처럼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화도 매우 아름답다? 읽는 것 자체가 행복감을 주는...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면 상당히 인생이 즐겁겠다는 생각도 들었고...하여튼 이 책은 단순한 진리이지만 그 진리를 찾기 위한 대화
과정이 중요한 그런 책이다
...줄거리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구체적 문장들이 모두 중요한 느낌이...


결국 이 이야기의 주제는...
영혼을 따르라...개인적인 소유 혹은 핏줄에 한정된 인간애에서 더 나아가 인류애 공동소유를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라...그런 의미같다...잘 모르겠다...뭔가 느껴지긴 했지만...
정확한 사실 하나는 이 책을 읽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두 번째 이야기는
네 눈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라는 제목의 이야기이다.
두 명의 러시아 군인이 전쟁터에서 고향에 가려다가 적인 타타르 족에게 잡히고 또 도망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인데..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줄거리 자체는 간단...일단 한 명은 잡히는데 총을 가진 또 한명의
군인은 그를 배신하고 혼자 도망가다가 그도 결국 잡힌다. 잡힌 상황에서 한 명은 그곳 사람들과 심지어
개까지 친근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며 호시탐탐 도망갈 기회를 찾다가 탈출을 시도하지만 또 한 명은 아주
비관적이며 시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나중에 한 명은 잘 도망갈 수 있지만 이전에 자신을 배신하고
홀로 도망간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결국 같이 다시 잡히고 만다. 그러나 다시 노력하여 탈출에 성공하고
그 배신했던 군인은 엄청난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군인도 같은 상황에서 보이는 태도가 아주 다르다.
일단 한 명은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져도 남을 버리고 가지 못하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쉽게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계속 탈출구를 찾는다. 반면 한 명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고 적이 시키는대로 다 들어주려고
하며 현재의 상황을 더 나아지게 스스로 노력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체념할 뿐... 톨스토이는 과식을 상당히
경멸하는 것 같던데 이 군인이 뚱뚱하였다는 설정도 의미가 있는 거겠지....



이 이야기의 주제는?
뭐 적용하자면 얼마든지 적용가능한 것이니...보기 나름...삶의 태도가 어느 방향인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좌절하지 않으며 굴족하지 않는 그런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너무 뻔하지...ㅎㅎ 나에게 적용해 보자면? 왜 사는가 모르니까 대충 살다가 죽자...보다는 끊임없이 생각해보자?
아니면...무턱대고 복종하지 말고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아라? (난 그럴 자신은 없다...ㅡㅡ;;)


이런 단순한 내용에서 뭔가를 느끼는 정도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클 것 같다...
나는...초딩 그것도 저학년 수준의 교훈을 얻는 느낌이 든다...





왜 우리는 그런 나태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왜 자신이 옳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생활을 계속해온 것일까요?
우리에게 생활을 변화시킬 힘이 그토록 없는 것일까요?


여전히 권태로워하면서 내가 이렇지 않았는데 나의 생활이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후회로 가슴을 치다가
마침내 죽어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들 신의 뜻에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막상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단계에 이르면
자식들에게 타격을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신의 뜻에 위배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종전 방식대로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자신만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거야
우리들은 그리스도 교도이기 때문이지


나는 다만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결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야.
단지 내 신앙을 따르고 있는 거지.

유리우스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좀 더 자극적인 쾌락을 맛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야만
했다. 좀 더 고급술... 친구와의 대화에서 더 나아가 여자와의 대화... 여자도 바뀌어야 한다...
육체적 만족이란 그런 것이다. 만족이 고갈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것을 강화시켜야 한다.


진정 나는 무엇인가?
행복을 구하는 인간이다.
나는 그것을 욕망 속에서 구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기쁨에 넘치는 사람이 있다.


우리들은 살면서 생각하고 구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향해 항상 전진해 나가는 거야.


유리우스는 성서를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희열이 마음 속에 차올랐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사상을 두드리는 사람들과 정신적 교감을 경험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책에 씌어져 있는 사상을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다.
살리고 싶다.
생의 길을 걷고 싶다.


우리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