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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전 - 덕수궁 미술관

by librovely 2007.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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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전- 덕수궁 미술관        2007. 6. 26 - 9. 30

 

 

 

비엔나...

비엔나 커피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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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미술관에서 렘브란트 전을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바뀌었나? 렘브란트 작품이 있기는 하다...

유럽 3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소장품을

64점 전시하고 있다. (작품 수가 적다는 느낌이 좀 ...)

 

 

세계사..유럽사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심지어 나는 국사도 별로 좋아하는 과목이 아니었다...

역사도 사실 알고보면 이런 저런 원인과 결과로 얽혀져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치밀하게 공부를 한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단순암기 과목으로 느껴졌고...

단순 암기는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이니 당연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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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미술 이해에도 많은 지장을

준다는 것을 이번 전시를 보고 느꼈다...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이라는데...

음... 설명을 읽어 보아도 영 뒤엉켜버리는 느낌이 들 뿐...

세계사는 지명이나 인명이 일단 꼬부랑~말이라서 더 암기곤란...

암기는 고사하고 읽는 동안도 영 헷갈린다...

그래서 설명을 좀 읽다가 그냥 작품을 순수한 작품으로 대하자고

합리화 시킨 후 전시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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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왕가 [Habsburg Haus]

 

오스트리아의 구제실()이며 유럽 제일의 명문가

10세기경알자스에서 북()스위스에 걸친 소영주()에서

비롯되었고, 11세기 스위스에 산성 합스부르크(매의 성)를 쌓은 후

합스부르크백()이라 불렀다.

대공위시대() 이후 실력 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가 1273년 이 집안의루돌프(1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선출된 왕은 정략결혼으로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주를 획득함으로써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아들이며 초대 오스트리아공()인알브레히트(1세)도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1308년 암살된 후로 15세기까지

독일 왕위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 동안 가령() 확대정책을

착착 진행시켜 케른텐 ·클라인등을 가령에 병합시키면서

이 집안은 남동() 독일의 대세력이 되었다.

1438년알브레히트 2세의 국왕 즉위 이후로는 독일의 왕위와

제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15세기 말의막시밀리안(1세)는

합스부르크가 중흥의 시조로,에스파냐 왕실과의 통혼으로

가령확대를 꾀하였고, 그의 손자로 황제와 에스파냐왕을 겸했던

카를 5세()에 이르러 지배영역은 최대규모에 달하였다.

카를 5세 이후 제위를 보유하는 오스트리아계()와펠리프 2세

에스파냐계로 분열되었다가, 후자는 1700년에 소멸되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계의 합스부르크는 독일 제위를 보유하고

오스트리아와 그밖의 본령() 외에헝가리·뵈멘 등을 영유

()하고,프랑스부르봉왕가()와 대항하는 동방의

국제적 세력이었다. 프랑스와의 대립은나폴레옹시대까지 계속

되어 나폴레옹과도 시종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결국 패하여

라인동맹성립을 계기로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버리고,

1804년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황제라 칭하였다.

19세기에 와서는프로이센과의 대항에서 패하여 독일 통일의

지도권을 빼앗기고독일제국세력권밖으로 밀려났다.

그 뒤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1918년

카를 1세가 퇴위하여 500년에 가까운 황제가()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나의 유일한 멘토 (?) 네이버 백과사전님의 설명...

열심히 외웠던 단어들이 눈에 띄니 괜히 마음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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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세, 레오폴드 빌헬름, 카를6세(렘브란트를 좋아한)는

특히나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렘브란트와 루벤스, 반다이크 까지는 들어본 것 같은데...

나머지 작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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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년 동안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작가는 달라도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마그리트나 앤디워홀처럼 뭔가 신기한 느낌의 그림은 아니었다.

흔히 생각하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색상이 상당히 고급스러웠는데...짙은 녹색이나 남색,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 혹은 황금색의 우아하게 늘어뜨려지거나 접힌

옷감은 너무 아름다웠다. 왕가에서 수집해서 그런지 아니면

왕가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 많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고급스럽고 기품이 있게 느껴졌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의미에서의 미술에 가장 충실한 작품들이

모여있는 느낌... 보고 있으면 눈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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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마다 제목과 함께 짤막한 설명이 쓰여있었는데...

그 설명에 종종 등장하는 매너리즘 미술...

그게 뭘까? 식상하다는 건가?

 

 


일정한 기법이나 형식 따위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어 독창성과

신선한 맛을 잃어 버리는 것을 매너리즘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현상유지 경향이나 자세를 가리켜 흔히매너리즘에 빠졌다고도

말한다.

미술사적 의미로는 1520년 이후부터 17세기 초
바로크 미술

부상하기 전까지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 확산되었던 양식을

지칭한다.

16세기 화가이며 미술사가인 바자리가 『미술가 열전』에서 사용

하였던 매너리즘이란 명칭은이탈리아어로 ""양식"", ""기법""을

뜻하는 디 마니에라(Di Maniera)란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림은 일정한 규범과 양식에 따라 그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당대에는 긍정적 의미로 쓰였던 매너리즘이란 명칭은 차차 16세기

후반의 일련의 미술 경향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즉,
미켈란젤로이후의 화가들이르네상스의 양식만을 표피적으로

모방한 결과, 르네상스의 균형과 이상미가 사라지고 왜곡과 과장이

형식화되었다는 후대의 부정적인 시각을 담게 되었다.

 


 

매너리즘이라는게 어떤 정신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냥 정해진

방법을 따른다는 말이었구나...

그래서 각기 다른 작가의 작품임에도 번잡한 느낌이 안 들었던

모양이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일단 초상화들...

상당히 패셔너블한 귀족들의 의상... 그림임에도 벨벳 질감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신기했다.

 

야채시장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기를 안고 야채를

파는데도 삶에 찌든 모습이 아니라 여유롭고 고상해 보였다는게...

그리고 화병에 꽃을 꽂아놓은 것도~~

 

갤러리를 그린 작품도 재밌었다. 그림 안에 수많은 그림이 있는...

 

비엔나의 풍경을 그린 큰 그림은 보고있으면 꼭 내가 그 장소에

가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 그림은 갖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사과를 깎는 여자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는 작품설명이 인상적...

사과를 깎는 것이 허무함을 표현한 것이라..삶의 덧없음을...

(허무함을 표현한 그림이 몇 작품 더 있었다)

 

늙은 여인이라는 그림은 그 시대에 지금의 모나리자처럼 상당히

높이 평가된 그림이라고 한다. 정말 주름 하나 하나가...

 

 

성경과 관련된 그림이나 신화를 소재로 삼은 그림도 꽤 많았다.

그런 그림에서는 별반 어떤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림책 삽화를 보는 듯한...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툼하게 살이 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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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처음에는 살 많이 쪘다...라고 생각했는데...

보다보니 그새 적응이 된건지 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의 기준...

정말 모호한 것 같다...

그림 속의 사람들 옆에 요즘 깡마른 모델들을 세워두면 아주

천박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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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술관을 나오면서 나의 미적 사고방식은 곧바로 요즘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 라 야 이 쁘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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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동 열 심 히 하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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